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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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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당
선화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선화당
한자 宣化堂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관광단지길 30-8 (웅진동)
지정(등록) 종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지정(등록)일 1982년 3월 4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선화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충청감영의 주건물이다. 선화당은 “임금의 덕을 드러내어 널리 떨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선화당 건물은 순조 33년(1833)에 지은 것으로, 원래는 현재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1937년 중동으로 옮겨 박물관 전시실로 사용되었으며, 1992년 현재 위치에 이전 복원되었다. 복원된 건물은 원형보다 축소되었으나 외관이 간결하여 조선시대 관청 건물의 위엄성을 보여주고 있다.

<집필진 원고 중 국문 내용>

충청감영은 조선 초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선조 35년(1602) 충청도 관찰사 유근(柳根)의 건의로 공주 공산성으로 이전되었다. 1653년 관찰사 강백년(姜栢年)이 봉황산 아래에 감영을 대대적으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자리 일대에 충청감영이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감영 건물은 49동 481칸에 이르렀지만, 1932년 대전으로 도청이 이전된 후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되고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문루, 동헌 등의 건물만 이전하여 복원된 상태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 후기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곳을 감영(監營)이라고 하는데, 선화당(宣化堂)은 감영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으며, 도내의 모든 행정업무와 군사·조세는 물론 송사·형옥 등 사법 업무까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선화당은 ‘임금의 덕을 드러내어 널리 떨치고, 백성을 교화한다.(宣上德而化下民)’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조선시대 관찰사의 임무와 성격을 잘 보여준다. 팔도의 감영 모두 관찰사의 집무처를 선화당이라 하였으며, 이곳 외에도 경상감영, 강원감영, 그리고 함경감영의 선화당이 남아 있다.

충청도의 감영은 본래 1395년(태조 4) 청주에 설치되었고, 공주에는 본영(本營)이 아닌 관찰사가 도내를 순찰하다 잠시 머무는 형태의 유영(留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1602년(선조 35) 당시 관찰사였던 유근(柳根, 1549-1627)이 감영을 공주로 이전할 것을 보고하고 허가를 받은 뒤, 공산성(公山城)을 수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603년(선조 36) 산성 안으로 감영을 이전하여 본격적으로 공주 소재 충청도 감영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감영의 위치는 산성 내부와 옛 유영으로 옮겨졌다. 최종적으로 오늘날 감영 터로 알고 있는 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일대로 옮기게 된 것은 1707년(숙종 33)이다. 선화당은 1706년 감영 이전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건립되었다. 1707년 이전을 완료한 후 선화당을 비롯하여 5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布政司) 및 삼문, 부속건물 1채만 남아있다. 원래 정면 9칸, 측면 5칸의 건물이었으나 몇 차례 옮겨 지으면서 정면 8칸, 측면 4칸 규모로 축소되었다.

현재의 선화당 건물은 1833년(순조 33)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일제감점기인 1932년 공주 중동의 구 국립공주박물관 부지내로 옮겨 지어 박물관 전시실로 이용되다가 1972년 공주박물관이 신축 개관되면서 전시실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1988년 해체하여 1992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포정사문루 Place 포정사문루
충청감영 Concept 충청감영
유근 Actor 유근(柳根_1549-1627)
공산성 Place 공산성
선화당 Place 선화당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포정사문루 충청감영 isRelatedTo
충청감영 유근 isRelatedTo
충청감영 공산성 isRelatedTo
포정사문루 선화당 isRelatedTo


참고자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충청감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1700496
  • 《세종실록지리지》 149권, 충청도.
  • 윤용혁 외, 《충청감영 400년》, 공주시·충남발전연구원, 2003. → “충청감영은 조선 초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선조 35년(1602) 충청도 관찰사 유근(柳根)의 건의로 공주 공산성으로 이전되었다. 1653년 관찰사 강백년(姜栢年)이 봉황산 아래에 감영을 대대적으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자리 일대에 충청감영이 자리잡게 되었다.”

기존 안내문에 기록되어 있는 위의 글은 모두 잘못된 사실이다. 충청감영의 개영 및 이전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먼저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조에 의하면, 1395년(태조 4) 충청도의 감영은 “청주”에 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790-1805년 편찬된 《공주감영읍지》와 조선말기 일부 읍지에서는 충주에 감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읍지 기록의 착오이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관찰사의 주임무가 도내의 순찰인데, 근무처인 감영으로 본영(本營)과 잠시 머무는 유영(留營)이 있었다. 조선전기 충청도 관찰사의 근무처인 충청감영의 본영이 청주에 있었고, 충주에는 유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 감영을 청주에서 공주로 옮긴 까닭은 공주의 지리적 조건, 즉 임진왜란을 통하여 서울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공주가 재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공주는 그 지형과 지세가 북쪽과 남쪽을 크고 작은 산들이 둘러쌓은 천연의 요새로서 서울과 호남을 잇는 가장 가까운 육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청주보다는 공주가 충청도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공주감영의 개영 시기에 대해서는 1598년, 1600년, 1602년 등의 견해가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충청감영 400년》을 참조할 수 있다.(이 부분은 《조선시대 외관제도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충청도 지역 전공자인 임선빈이 집필하였기에 신뢰성이 높다.)

결론을 종합하면 1602년 관찰사로 부임한 유근이 감영을 설치하는 절차를 계문하여, 1603년에 비답이 내려지니, 공산성을 수축하고 감영을 산성 안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산성 안의 감영은 오래가지 못하고 다음해인 1604년에 공주 고을의 구영(舊營, 즉 본래 공주에 설치되어 있던 유영(留營)을 말한다.)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646년 관찰사인 임담은 감영을 다시 공산성 안으로 옮겼다. 1645년 12월에 부임한 임담은 1646년 4월에 충청도 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였다. 그런데 구영에 방어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반사건이 또 다시 발발할 것을 우려하여 40여 년간의 구영을 청산하고 1646년 7월에 공산성 안으로 황급히 감영을 옮긴 것이다.

8년이 지난 1653년 관찰사 강백년은 봉황산 아래의 옛터로 또 다시 감영을 옮겼다. 그리고 이 때 이전에 앞서 감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였다. 그런데 강백년에 의해 복원된 구영은 대천(大川-현재의 제민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매년 홍수를 당하여 관아가 침몰되어 건물이 벗겨지고 퇴폐하여 도사(都事)의 처소인 피향당(披香堂)에 임시로 머물러 다스리게 되니, 50여 년이 지나 비로소 감영의 이건에 대한 논의가 있게 되었다. 1703년에 관찰사를 지낸 김연(金演)은 산성 안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고, 1704년 관찰사를 지낸 이제(李濟)는 편리함을 내세워 서쪽 봉황산 아래(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일대)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제의 의견을 지지하였으나 바로 착수하지 못하다가, 1706년에 관찰사 이언경이 착공하여 미완성한 것을 1707년에 관찰사 허지가 4개월만에 완성하였다. 선화당의 건립은 《여지도서》에 의하면 1706년 이언경이 감영 이전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