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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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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사당
농암사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농암사당
한자 聾巖祠堂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163번지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호
지정(등록)일 1973년 8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농암사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분강서원(汾江書院)의 사당이다.

순조(純祖) 27년(1827)에 건립되었으며 원래는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5년 도산면 운곡리로 옮겼다가 2005년 농암유적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다시 이건 하였다.

현재의 사당은 신문(神門)과 사당로 구성되어 있으며 담장은 토석담장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우물마루로 바닥을 깔고 벽에는 농암의 영정을 모셨는데 경상도 관찰사 시절의 모습이라고 한다. 1800년대 건물이지만 고식이 잘 남아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이현보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분강서원(汾江書院)의 사당이다.

안동에서 태어난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노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 이황 등과 교유하며 자연을 노래하는 시조 등의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다.

사당은 순조 27년(1827)에 처음 세워졌다. 원래는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5년 도산면 운곡리로 옮겼고, 농암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2005년에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 지었다.

'숭덕사'라는 현판을 걸고 서원 경내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건물 주위에는 낮은 담을 둘렀다.

사당 벽에 모셔져 있는 영정은 후손들이 이재관(李在寬, 1783-1837)으로 하여금 모사하게 한 별본으로, 1827년에 제작되었다. 이현보가 중종 31년(1536)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시절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하며, 원본은 보물 제872호로 지정되어 현재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관하고 있다.

  • 보물로 지정된 이현보 초상(보물 제872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으므로 현재 사당에 걸려 있는 영정은 별본 영정(농암영정 후사본 및 금서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으로 판단됨.
  • 분강서원은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7년에 복원되었으며,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옮겨졌던 것을 농암 종택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이현보 Actor 이현보(李賢輔,_ 1467-1555)
농암_사당 Place 농암_사당
숭덕사 Place 숭덕사
분강서원 Place 분강서원
안동댐_건설 Event 안동댐_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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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_초상 Heritage B00-087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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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관 Actor 이재관(李在寬,_1783-1837)
한국국학진흥원 Place 한국국학진흥원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이현보 농암_사당 isEnshrine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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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서원 숭덕사 has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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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_초상 한국국학진흥원 currentLocation

갤러리

참고자료

  • 이현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501 →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둔다.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교유했으며 고향에 돌아와서는 시를 지으며 한가롭게 보냈다.
  • 농암사당,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777 → 농암사당은 방형(方形)의 토석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대문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전퇴(前退)를 둔 형식이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네모기둥을 사용하고 기둥 위에는 공포(栱包)를 두지 않고 납도리에 장혀만으로 구성한 장혀수장집이다. 외부의 모습은 매우 간소하게 하였으나 내부의 가구는 2중량을 둔 5량 구조이다. 가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종도리를 받친 대공이 별설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경상북도 경주 안강에 있는 독락당(獨樂堂)의 대공과 흡사하다. 정면 3칸 모두에 궁판이 있는 정자살 두 짝 여닫이문이 달려 있으며, 측벽에도 정자살 광창을 내었는데 그 구성법과 솜씨가 예안향교 대성전이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후조당(後彫堂) 가묘(家廟)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사당 내에는 우물마루로 바닥을 시설하고 주벽에는 농암 영정을 봉안하였다.
  • 이현보 초상,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709

→ 농암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시조 작가로 1498년(연산군 4)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곧은 성품으로 직언을 함에 따라 안동으로 일시 유배되는 등 정치적으로 기복이 심한 생활을 하였다. 76세 때인 1542년(중종 37)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고향인 예안(禮安)으로 돌아와 89세에 사망하기까지 자연을 벗하여 시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강호 시조의 대표로 꼽히는 「어부가(漁夫歌)」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조를 남겨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현보는 1612년(광해군 4) 향현사에 제향되었다가 1700년(숙종 26) 예안의 분강서원으로 옮겨졌다. 「이현보 초상」은 1986년 10월 15일 보물 제872호로 지정되었다. / 「이현보 초상」은 이현보가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하던 1536년(중종 31) 팔공산 동화사의 옥준상인(玉埈上人)이라는 승려가 그렸다고 전한다. 규격은 126×105㎝이다. / 후손들이 영정(影幀)의 마모를 염려하여 1827년(순조 27) 소당 이재관(李在寬, 1783~1837)으로 하여금 모사하게 한 별본영정(別本影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과 함께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