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독락당
경주 독락당 Dongnakdang House, G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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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주 독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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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Dongnakdang House, Gyeongju |
한자 | 慶州 獨樂堂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300-3 |
지정(등록) 종목 | 보물 제413호 |
지정(등록)일 | 1964년 11월 14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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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독락당은 조선시대 유학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별장으로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한다. 중종 27년(1532)에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자 낙향하여 처음에는 계정(溪亭) 자리에 3칸의 띳집을 지었으나 뒤에 정혜사(淨惠寺) 주지의 주선으로 띳집을 헐고 계정과 양진암(養眞菴), 독락당을 잇달아 지었다.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는 이름을 가진 독락당에서 그는 조정으로 복귀할 때까지 학문을 닦았다. 독락당은 무엇보다도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공간이다. 건물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살창을 달아서 대청에서 계곡을 내다볼 수 있다.
영문
Dongnakdang House was the residence of Yi Eon-jeok (1491-1553), a civil official and one of the most prominent Confucian scholars of the Joseon period. Yi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14 and served in various government posts. In 1532, he was temporarily removed from office, after being involved in a political dispute,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in Gyeongju to stay in this house.
Dongnakdang consists of a women’s quarters, men’s quarters, servants’ quarters, shrine, and two ancilliary buildings. A pavilion named Gyejeong is also located in the rear garden. The women’s quarters was built in 1516, and the other buildings, including the men’s quarters, were built after 1532.
The buildings of this house harmonize well with the surrounding natural environment. The picturesque view of Jagyecheon Stream from Gyejeong Pavilion is especially breathtaking. In addition, the wall in front of the men’s quarters has the unique feature of a wooden window with vertical lattices, so that the stream can be viewed from the wooden-floored hall of the men’s quarters.
The wooden-floored hall of the men’s quarters features a plaque with the residence's name, “Dongnakdang (獨樂堂),” which means “a hall for solitary enjoyment.” This name symbolizes Yi Eon-jeok’s wish to leave the complicated secular world and enjoy studying in nature.
영문 해설 내용
독락당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의 대가인 이언적(1491-1553)이 살던 집이다. 이언적은 1514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1532년 정쟁에 휘말려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고, 고향인 경주 지역에 돌아와 이 집에 머물렀다.
독락당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공수간, 어서각, 계정,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1516년에 지어졌고, 사랑채를 비롯한 다른 건물들은 이언적이 낙향한 1532년 이후에 지어졌다. 독락당은 주변 자연 경관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후원의 계정과 자계천의 어울림이 압권이다. 또한 사랑채 옆쪽 담장에는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서 대청에서 계곡을 내다볼 수 있게 했다.
사랑채 대청에 ‘독락당’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으며, ‘독락당’은 ‘홀로 즐기는 곳’이라는 뜻으로, 시끄러운 바깥일과 관계를 끊고 자연에서 학문을 즐기려는 이언적의 생각을 보여준다.
독락당은 조선시대 유학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별장이다. 중종 27년(1532)에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자 낙향하여 처음에는 계정(溪亭) 자리에 3칸의 띳집을 지었으나 뒤에 정혜사 주지의 주선으로 띳집을 헐고 계정과 양진암, 독락당을 잇달아 지었다.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는 이름을 가진 독락당에서 그는 조정으로 복귀할 때까지 학문을 닦았다. 건물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살창을 달아서 대청에서 계곡을 내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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