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원융국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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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원융국사비
Stele of State Preceptor Wonyung at Buseoksa Temple
부석사 원융국사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부석사 원융국사비
영문명칭 Stele of State Preceptor Wonyung at Buseoksa Temple
한자 浮石寺 圓融國師碑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로 345 (부석면, 부석사)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지정(등록)일 1979년 1월 25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부석사 원융국사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원융국사비는 고려 시대 스님인 결응(決凝, 964-1053)을 기리는 비이다.

결응은 12세에 출가하였고 고려 성종 10년(991)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28세에 덕이 높은 승려인 대덕(大德)이 되었다. 정종 7년(1041)에 부석사로 들어와 화엄종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문종 대에 국사(國師)*가 되었다. 문종 7년(1053)에 결응이 부석사에서 입적하자 문종은 결응에게 ‘원융’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원융국사비의 비문은 고청(高聽)이 짓고 글씨는 임호(林顥)가 썼다.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운 뒤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신은 깨어지고 갈라져 있던 것을 이어 붙였다. 거북받침돌은 비신과 크기가 맞지 않아 비신의 원래 받침돌이 아닐 개연성이 있다. 거북받침돌은 많이 달았지만,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거북받침돌 아래쪽에는 꽃무늬를 새겼고 등에는 선명한 육각 무늬가 덮여 있는데, 육각 무늬 안에는 ‘王’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머리는 용머리로 표현하였지만, 돌사자의 머리처럼 보인다.

파손으로 비문의 처음과 끝부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금석총람』이란 책에 비문의 전체 내용이 실려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결응이 입적한 무렵에 세웠다고 생각된다. 원융국사비는 고려 시대의 승려 활동과 돌 다듬는 기술 등 여러 분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영문

Stele of State Preceptor Wonyung at Buseoksa Temple

This stele commemorates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the Buddhist monk Gyeoreung (964-1053), also known as State Preceptor Wonyung.

Gyeoreung became a monk at the age of 12,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for monks in 991, and was known to be a highly virtuous person. In 1041, he came to Buseoksa Temple and joined the Hwaeomjong Order. In 1047, he was appointed as a state preceptor. When the monk died in 1053, King Munjong (r. 1046-1083) bestowed him with the posthumous name Wonynung, meaning “complete interfusion,” which is a reference to the ultimate state of reality in which all phenomena are completely harmonized.

Although uncertain, it is presumed that the stele was erected in the year after Monk Gyeoreung’s death. The stele consists of a platform, a tortoise-shaped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body stone had split into several pieces which were reattached. The size of the pedestal does not match the size of the body stone which suggests that the pedestal may not be original. The pedestal is decorated with floral designs at the bottom and hexagonal tortoise-shell patterns at the top.

Although a significant part of the stele’s inscription is now illegible, the Survey of Korea’s Inscriptions (Joseon geumseok chongnam), published in 1919, contains the entire text of the inscription.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고려시대의 승려인 원융국사 결응(964-1053)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결응은 12세에 출가하였고, 991년에 승과에 급제한 뒤 높은 덕으로 명망을 쌓았다. 1041년에 부석사에 들어와 화엄종의 법통을 계승하였고, 1047년 국사로 책봉되었다. 1053년에 결응이 입적하자, 문종(재위 1046-1083)은 '모든 현상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궁극의 상태'라는 의미의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정확하지 않고, 결응이 입적한 입적한 해 또는 다음 해에 세웠다고 추정된다. 비석은 바닥돌,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은 여러 조각으로 깨져 있던 것을 이어 붙였다. 받침돌은 비신과 크기가 맞지 않아 원래 받침돌이 아닐 수도 있다. 받침돌의 아래쪽에는 꽃무늬를 새겼고 등에는 선명한 육각 무늬가 있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많이 파손되었으나,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금석문을 모아 1919년에 간행한 『조선금석총람』이란 책에 비문의 전체 내용이 실려 있다.


  • a term used in the Huayan and Tiantai traditions to refer to the ultimate state of reality wherein each individual phenomenon is perceived to be perfectly interfused and completely harmonized with every other phenomena. - The Princeton Dictionary of Buddhism, p. 1041.

참고자료

  • 부석사원융국사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List.do?menuIdx=584 -> 결응이 입적한 이듬해인 1054년에 세워졌다. / 특히 화엄종찰 부석사 무량수전의 불상 배치가 의상의 창건 당시의 구도임을 확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명에 이어 맨끝에 수비원(守碑院)이라 하여 탑전과 비슷한 비를 수호하는 건물을 두고 3인의 문도가 지키도록 하였다는 것이 이채롭다.
  • 부석사원융국사비, 디지털영주문화대전, http://yeongju.grandculture.net/yeongju/toc/GC07400476
  • "부석사 원융국사비", 금석문 검색,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http://221.145.178.199:9296/streamdocs/view/sd;streamdocsId=fDXXfKz-y1tL5qmlIMgJhyOR5nXTItqUUV0mXyTz6OA;code=371;type=1 -> 비문 원문과 해석문 참고.
  • 1000년 전 왕이 “명문으로 새기라…” 「부석사 원융국사비」, 영주시민신문, 2020.2.20. https://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4359 -> 거북받침돌 규모는 170×130cm 정도이고 비 몸은 중간부분이 세로로 심하게 균열된 것을 철제로 꿰매 붙였다. 상단 우측과 하단 우측이 파손됐으나 본문 글씨는 또렷하다. 거북받침돌의 머리는 우측으로 돌렸는데 사자상처럼 보인다. 등에는 6각 무늬가 선명한데 무늬마다 ‘왕(王)’자를 새겼다. 아마도 왕의 명으로 새긴 비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함인듯하다. 비신높이 1.73m, 너비 1.1m, 두께 15㎝이다. 글씨는 자경(字徑) 2㎝의 해서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 부분 마멸로 비의 건립연대는 찾지 못했다고 전한다. 결응이 입적한 1053년이나 다음해인 1054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면에만 비문을 새겼는데 총 글자 수가 2263자(마멸 161자)로 광개토대왕비 1775보다 488자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