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방초정
김천 방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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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천 방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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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泉 芳草亭 |
주소 | 경상북도 김천시 상좌원1길 41 (구성면) |
지정(등록) 종목 | 보물 제2047호 |
지정(등록)일 | 2019년 12월 3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김천 방초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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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선 선조 때 부호군을 지낸 이정복이 1625년(인조 3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그 후 1689년 퇴락한 것을 그의 손자 이해가 중건하고 1736년의 큰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8년에 가례증해를 저술한 이의조가 3창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가운데 온돌방을 설치하고 사방으로 마루를 꾸몄다. 건물 중앙에 온돌방을 설치하는 구성은 호남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이 지역에서는 극히 드문 구성방식이다. 온돌방은 벽이 없이 사면을 창호로 둘렀고, 앞과 뒤로 출입문을 만들었다.
화강암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막돌로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온돌방을 구성하는 네 기둥을 제외하고는 둥근 기둥을 세웠다. 2층으로의 출입은 건물 왼쪽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이용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정자는 조선 선조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이정복(李廷馥, 1575-1637, 호 방초)이 1625년 경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1689년 손자 이해(李垓, 1630-1698)가 중건하였고 1727년에 보수되기도 하였다.
1736년의 큰 홍수로 인해 유실된 것을 1788년 예학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정복의 5대손 이의조(李宜朝1727-1805)가 현재 위치로 옮겨 다시 짓고 강학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정자는 중앙에 온돌방이 있고 사방에 난간을 덧댄 마루를 낸 형태이다. 온돌방 전체를 두른 창호는 필요할 경우 들어 올려서 전체를 트인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층에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고, 건물의 서쪽에 출입을 위한 계단이 있으며, 처마 끝에는 지붕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한 보조 기둥을 길게 세웠다.
정자 앞에는 2개의 인공섬을 둔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최씨담(崔氏潭)’이라고 부르는 이 연못에는 1632년 정려를 받은 이정복의 부인 화순최씨(和順崔氏)와 그녀의 몸종 석이(石伊)의 이야기가 전한다.*
최씨는 임진왜란 때 피난을 떠난 시댁 식구들을 찾아 나섰다가 왜적에게 쫓기게 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연못에 투신했고, 석이는 주인을 따라 자결하였다고 한다.
- 최씨담(崔氏潭) 이야기 : 17세의 나이로 이정복과 결혼한 최씨는 혼인 1년 만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상원리의 시댁으로 향했다. 그녀는 피난을 떠난 시댁 식구를 찾아 나섰다가 왜병에게 쫓기게 되었고, 연못에 투신해 정절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그녀의 몸종 석이도 주인을 따라 투신해 죽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이정복은 최씨가 투신한 연못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고, 방호정을 세워 그녀를 기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방호정 옆에 최씨의 정려각이 있다. 최씨는 1632년에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인조가 손수 쓴 정려문을 하사했다. 1764년에 정문(旌門)을 세웠고, 1812년에 여각을 고쳐 지었다. 정려각 앞에는 몸종 석이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975년 연못을 보수하면서 발견된 것이다.
- 정자가 있는 상원리는 연안이씨의 집성촌이다.
- 이정복이 이 정자를 지은 이유에 대해서는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부인을 추모하며 지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