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극와고택
성주 극와고택 Geugwa House, S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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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성주 극와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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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Geugwa House, Seongju |
한자 | 星州 極窩古宅 |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한개2길 40 (월항면)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77호 |
지정(등록)일 | 2013년 4월 8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대한제국시대 |
수량/면적 | 2동/893㎡ |
웹사이트 | 성주 극와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극와고택은 사랑채에 적힌 상량문*을 보면 철종 3년(1852)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극와고택이란 이름은 이 집의 주인이었던 이주희의 호 ‘극와(極窩)’에서 따왔다.
이주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흰옷과 흰 갓을 쓰고 생활하였다. 또한 그는 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이를 한탄하며 방에 거적을 깔고 생활하였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 화장실의 4동으로 이루어졌으나, 곳간채는 없어지고 지금은 3동만 남았다. 극와고택의 안채는 기와집이고, 사랑채는 초가집임에도 불구하고 평면구성이 기와집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양반 가옥으로 손색이 없다. 처음 집을 지었을 때는 안마당의 동쪽에 곳간채가 있어 사랑채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ㄷ’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는 곳간채가 철거되고 ‘ㅡ’ 모양의 사랑채와 안채만 남아 ‘二’의 모양이 되었다.
- 상량문(上樑文):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
영문
Geugwa House, Seongju
This house is presumed to have been built in 1852. The name Geugwa was the pen name of Yi Ju-hui (1866-1946), who lived in this house.
Yi Ju-hui was a filial son who stayed by the side of his mother's tomb for the three year mourning period after she died. Furthermore, when Japan colonized Korea in 1910, Yi lamented his country's fortune and went into mourning by confining himself in a straw-floored room and dressing only in mourning attire.
The house consists of a men's quarters with a thatch roof, a women's quarters with a tile roof, and a bathroom which was added later. There was originally a storehouse to the right of the women's quarters, but it was torn down. The men's quarters consists of, right to left, of a wooden porch, a large underfloor-heated room with a narrow wooden veranda along the front, and a small underfloor-heated room. The women's quarters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in the center with an underfloor-heated room to each side and a kitchen at the far left.
- 3년 동안 흰옷과 흰 갓을 쓰고 생활하였다. / 묘소를 지킨 효자이다.
- 뜻은 완전 다른데요. 일부러 이렇게 바꾼 이유가 있나요? 묘소를 지킨 거면 그냥 묘소 옆에 집을 짓고 거기서 살았다는 건대요. 단순히 completed the two-year mourning period인가요?
- 사람들이 싫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18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집의 이름은 이곳에 살았던 이주희(1866-1946, 호: 극와)의 호에서 따왔다.
이주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묘소를 지킨 효자이다. 또한 그는 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이를 한탄하며 방에 거적을 깔고 소복을 입은 채 두문불출하였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와 후대에 지은 화장실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안채 오른쪽에 곳간채가 있었는데, 나중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초가지붕을 얹은 사랑채는 오른쪽에서부터 마루, 큰사랑방, 작은사랑방이 있고, 큰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맨 왼쪽에는 부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