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대왕신종 종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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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 종각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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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성덕대왕신종 종각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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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德大王神鐘 鐘閣터 |
해설문
국문
경덕왕(재위 742~765)은 중앙집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성덕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대종을 만들려 하였으나, 당대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뒤를 이은 아들 혜공왕이 771년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다.
원래 봉덕사(奉德寺)에 있었으나 북천 홍수로 절이 없어지면서 종을 영묘사(靈妙寺)로 옮겼다가 1506년 이곳 봉황대(鳳凰臺) 옆으로 옮겨 파루(罷漏)*로 이용되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東部洞)의 옛 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겨졌다가 1995년 성덕대왕신종만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은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 제1167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중의 하나이다.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 파루(罷漏): 조선시대에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기 위해 종(쇠북)을 치던 일. 밤 10시경 종을 28번 쳐서 인정(人定)을 알리면 도성(都城)의 문이 닫혀 통행금지가 시작되고, 새벽 4시경인 오경삼점(五更三點)에 종을 33번 쳐서 파루를 알리면 도성문이 열리고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