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 옛길
죽령 옛길 Old Path of Jungnyeong Pa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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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죽령 옛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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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Old Path of Jungnyeong Pass |
한자 | 竹嶺 옛길 |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죽령로1513번길 41-9[수철리 195] |
지정(등록) 종목 | 명승 제30호 |
지정(등록)일 | 2007년 12월 17일 |
분류 | 자연유산/명승/역사문화명승 |
수량/면적 | 151,115㎡ |
웹사이트 | 죽령 옛길,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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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죽령은 영주시 풍기읍과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죽령재 또는 대재라고도 한다. 소백산 국립공원에 있는 죽령은 문경새재, 추풍령과 함께 영남 지방의 대표 길목 중 하나로 알려졌다. 옛길은 예전에 다니던 길을 말하는데, 죽령 옛길은 죽령을 중심으로 영주와 단양을 이어주던 옛날 길이다.
죽령 옛길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시대에 편찬한 『삼국사기』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158) 3월에 비로소 죽령 길이 열리다.”라는 기록과 조선 시대에 발간한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 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라는 기록을 통해 늦어도 삼국 시대에는 사람들이 죽령 옛길을 활발히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죽령 일원은 삼국 시대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양국의 분쟁 지역이자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에 신라 진흥왕 12년551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의 10개 고을을 탈취하였다는 기록과 고구려 영양왕 1년590에 고구려의 온달(溫達)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다짐한 기록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죽령 옛길은 삼국 시대 이후 조선 시대까지 계속 중요한 교통로였다. 20세기 초반까지도 경상도의 동북 지역에 있는 많은 고을에서 서울로 갈 때 모두 죽령 옛길을 이용하였고 죽령 주변에는 나그네와 말들이 쉬어 가던 여러 시설이 있었다. 이후 철도 등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죽령 옛길을 오가는 사람이 없어졌고 길은 방치되어 사라졌다. 1999년에 영주시에서 영남 내륙을 이어온 죽령의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려고 희방사역에서 죽령 주막까지 2.5㎞ 정도의 길을 복원하였다. 이후 2007년에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죽령 옛길은 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과 길게 이어지는 수목 터널이 주변의 소백산 주요 산등성이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이루는 한국의 자연유산이다. 또한,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오갔던 곳으로 우리 민족의 삶과 애환이 담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역사적 장소이다.
- 순사 :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죽령 옛길은 영주시 풍기읍과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를 중심으로 하는 옛날 길이다. 소백산 국립공원 내에 있는 이곳은 문경새재, 추풍령과 함께 이 지역으로 통하는 대표 길목 중 하나이다.
울창한 수목이 터널을 이루는 이 길을 걷다 보면 죽령계곡의 물소리가 들린다. 이곳은 나무들이 소백산의 주요 능선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며, 계절마다 다양한 야생화가 피어나 볼거리를 더해주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 길을 오가던 사람들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가 담겨있는 역사적 장소로, 길 곳곳에 관련 이야기를 적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삼국사기』 및 다른 기록들을 보면 삼국 시대에도 이미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이 길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에 자리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까지도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으나 철도 등의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쇠락했는데, 1999년 영주시에서 희방사역에서 주막터까지 2.8km 가량을 복원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 이 길에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2세기 무렵 신라 사람인 죽죽이 왕명에 따라 이 길을 개척하고 힘이 다해 죽었기 때문에 그를 기리기 위해 ‘죽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향가 ‘모죽지랑가’의 주인공인 화랑 죽지의 탄생과 관련한 이야기, 고개 너머 단양에 전해지는 온달 관련 이야기, 퇴계가 그의 형과 이곳의 주막에서 회포를 풀었다는 이야기, 도적떼를 소탕한 산신 ‘다자구 할머니’ 이야기 등 시대도 다양하다.
참고 자료
- 죽령 옛길, 디지털영주문화대전 http://yeongju.grandculture.net/yeongju/toc/GC07400266
- [옛길을 찾아서] ⑸ 죽령, 아흔아홉 굽이에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 월간 山, 2009. 12. 9. http://san.chosun.com/m/svc/article.html?contid=2009120400925-> 오른쪽으로는 죽령계곡이다. 숲이 우거지고 험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물소리만 들렸다. 아래쪽으로 철도휴양소가 있다고 했다. 철도휴양소로의 접근을 금지시키느라 커다란 보호철망이 쳐졌다. 철망을 우회했다. 울창한 숲길이 계속 됐다. 발밑으로는 중앙고속도로 터널이다. 그러고 보니 중앙고속도로 터널 위로 걸어가고 있었다. 중앙선 철도와 중앙고속도로는 나란히 소백산을 관통해서 달린다.
- [죽령옛길 A] 희방사주차장에서 죽령옛길 주막터까지, 구름따라 바람따라,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lsw24001/221557073334
- 천년의 인적이 서린 영남의 관문, 영주 죽령 옛길 http://www.traveli.co.kr/read/contentsView/1133/24 -> 한편 이 죽령 옛길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옛길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다. 언뜻 보면 평범한 소나무처럼 보이는 나무들이나, 이 나무들의 정확한 이름은 일본잎갈나무다. 말 그대로 일본에서 많이 자라는 수종 중 하나. 이 나무들이 죽령에 터를 튼 것은 일제강점기 시기, 소나무를 모두 베어간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쟁 물자로 소나무를 송두리째 실어나간 뒤 민둥산이 되어버린 이 주변에 일본잎갈나무를 심은 것이다. 그 이유도 분분하다. 소나무가 한민족의 정기를 상징하는 만큼 민족 정기를 짓밟기 위해 그랬다는 말도 있고, 소나무보다 빨리 자라는 잎갈나무를 이용해 또 다른 전쟁물자를 만들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
- 〈15〉 영주 죽령 옛길, 금강신문, 2010.7.16.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721 -> 죽령의 숲은 인공으로 심은 2차림이 대부분이다. 활엽수가 많아서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단풍나무의 한 종류인 신나무도 죽령에서 흔히 관찰된다. 옛 사람들이 먼 길을 오갈 때 짚신이 헤지면 벗어서 이 나무 가지에다 걸어두었다고 해서 ‘신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옛길에 어울리는 전설이다. 숲길 왼편으로는 계곡의 물소리가 청아하다. 고갯길 주변으로 영주시 당국에서 길손을 위해 생태해설판과 벤치를 여러 곳에 놓아두었다. 서낭 같은 돌탑도 정감 있게 서있다. 죽령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낙엽송은 이름 그대로 가을이면 낙엽이 지는 소나무이다.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다고 ‘일본이깔나무’라고도 한다. 우리 소나무보다 생육이 빠르고 곧기 때문에 예전에는 전봇대로 많이 썼다. 지금도 국내에서 산림녹화로 가장 많이 심어지고 있다. 선진국 국민들일수록 숲 이용도가 높다는 보고서가 여러 곳에서 나왔다. 숲길을 걷는 것은 그 자체가 피톤치드로 샤워를 하는 삼림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