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모당
HeritageWiki
이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2월 8일 (월) 16:50 판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첨모당.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3150000 첨모당], 국가문화유산포...)
첨모당 |
|
대표명칭 | 첨모당 |
---|---|
한자 | 瞻慕堂 |
주소 |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315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5호 |
지정(등록)일 | 1995년 12월 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첨모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국문
첨모당은 통례원 봉례*를 지낸 황전(黃躔)이 조선 세종 11년(1429)에 은퇴하여 지방 유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세웠다. 첨모당은 선조들의 학덕과 업적을 우러러 사모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 후 영조 11년(1735)에 창원 황씨 일족이 중심이 된 영주지역 사람들에 의해 사당*으로 다시 지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정조 2년(1778)에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이며, 가운데 마루가 있고 양 옆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단아한 건물이며, 홑처마에 한식기와를 이었다. 특히 창문 수법이 오래된 법식을 잘 갖추고 있다.
- 통례원 봉례(通禮院 奉禮) : 조선시대 통례원의 정4품 관직
- 사당(祠堂) : 조상들의 위패(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 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건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건물은 황전(1391-1458)이 교육과 학문 연마를 위해 1429년에 세웠다. ‘첨모’는 선조들의 학덕과 업적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황전은 1426년에 국가의 의례를 담당하는 통례원의 관료를 지냈으며, 낙향 후 이 마을에 들어와 이 건물을 세우고 지역 유생들을 교육하며 지냈다고 한다.
1735년 후손들이 사당으로 다시 지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778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건물 중앙에 난 창문의 수법이 특이하다.
참고 자료
- 건물 중앙에 난 창문의 수법이 특이하다. -> 마루방 전면에 외여닫이 굽널 세살문과 외여닫이 울거미 띠장널문이 함께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쉽게 설명 못하겠음....)
- 이 마을은 창원 황씨의 집성촌이다.
- 건물의 왼편에 그의 위패를 모신 숭보사가 있다.
참고 자료
- 첨모당, 유교넷, http://www.ugyo.net/tu/rin/ruins.jsp?sSiteCode=yebs033 -> 첨모당은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창원황씨 집성촌 안쪽에 있다. 본래 세종 때 황전(黃躔)이 지방의 유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였다. 선조들의 학덕과 업적을 우러러 사모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강학을 하던 강당이다. 1538년에 고택을 중수하여 첨모당이라 현판을 걸었다. 첨모당은 숭보사(崇報祠) 우측으로 한 단 낮은 곳의 방형토장 안에 건립되었으며, 좌측담에 세워진 낮은 일각문을 통하여 출입할 수 있다. 경사진 대지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기단을 조금 높게 조성한 후 남향으로 앉혔다.
- 창원인 황전선생과 영주 병산리 갈참나무, 나무 이야기 꽃 이야기,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ljw1674/18302066 -> 인물 내력 상세
- 조상을 우러러 그리워(瞻慕)하며 학문에 힘쓴 마을, 영주시민신문, 2014.8.28. http://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1498 -> 마을 안쪽에 있는 첨모당(瞻慕堂,영주시문화재 제315호)은 황전(黃전, 1391〜1459)이 세종 11년(1429)에 학문을 연마하고 지방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단아한 건물이다. 창호 수법이 오래된 법식을 잘 지니고 있는데, 특히 마루방 전면에 외여닫이 굽널 세살문과 외여닫이 울거미 띠장널문이 함께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첨모당이란, 선조들의 학덕과 업적을 우러러 사모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황전은 1458년(세조4)에 사직하고 순흥 병산에 내려와 은거했다. 그 후 1535년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증직되고 그 3년 후인 1538년에 고택을 중수하여 첨모당 현판을 걸었다. 첨모당 앞에 회화나무가 있고 그 옆에 신위를 모신 숭보사가 있다.
- 디지털영주문화대전의 ‘첨모당’ 항목은 ‘첨모정’(다른 건물)에 대한 설명이므로 참고하지 않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