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벽한정
합천 벽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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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합천 벽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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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陜川 碧寒亭 |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손목3길 94 (용주면, 제실)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3호 |
지정(등록)일 | 1996년 3월 1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합천 벽한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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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벽한정은 조선 인조대의 유학자 임헌 박인(臨軒 朴絪)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이다. 이 건물은 1639년(인조 17)에 건립했으며, 황강가에 자리 잡아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선생의 본관은 고령이며, 남명 조식의 대표적인 사숙제자(私淑弟子)로 덕망과 학식과 충절이 뛰어난 선비이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 이후에 무민당(無悶堂)이라 호를 바꾸었다. 과거를 통한 출세를 포기하고 향리에서 향약(鄕約)을 시행하는 등 유학자로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고, 스승인 남명 조식의 학문과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쳤는데, 그 흔적이 이곳 벽한정에 남아 있다.
- 사숙(私淑) :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유학자 박인(1583-1640)이 1639년에 강학 및 문인들과의 교유를 위해 세운 건물이다.
박인은 합천 출신으로 1610년 향시에 1등으로 합격했음에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1637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호를 바꾼 후 은거하며 일생을 보냈다. 그는 특히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 조식(1501-1572)을 본받고자 노력했으며, 조식의 연보를 비롯해 그의 학문과 정신을 알리기 위한 여러 책들을 편찬하였다.
건물은 서쪽에는 대청을 두고 동쪽에는 온돌방을 두었으며, 전면에는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단 구조이다.
벽한정 동쪽에는 박인을 배향한 용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박인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고자 1658년에 지었다.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1867년에 훼철되었던 것을 1914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박인과 박인의 아버지 박수종, 동생 박위 등 3인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올린다.
서원에는 박인의 저술 및 문집 책판들도 보관되어 있었는데, 도난과 파손의 위험 때문에 2008년에 합천박물관으로 옮겼다.
- 박인은 1628년에 남명의 셋째 아들 조차마(曺次磨)의 부탁으로 남명 선생의 연보와 사우록의 편찬을 맡았고, 제자들과 함께 남명의 연원록(淵源錄)인 <산해사우연원록> 및 <言行錄>과 <年譜>를 편찬해 남명학 문헌의 1차적인 정리 작업을 이루어냈다. (합천 인터넷 뉴스 참조)
- 벽한정 입구에는 박인의 자취를 기리기 위한 비석[遺躅碑]이 세워져 있다.
- 안에 걸린 여러 개의 현판 중에는 조식 사상의 핵심이 되는 ‘경의’ 두 글자를 새긴 것이 있는데, 이는 박인이 조식의 뜻을 계승하고자 하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서원 경내에는 사당과 기숙사 건물이 남아 있으며, 벽한정과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영역이 나뉘어 있다.
참고자료
- 지자체 제공 조사자 의견 중 -> 벽한정 본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왼쪽과 앞쪽 전체에 마루를 깔았으며, 건물 둘레는 난간으로 꾸몄다. 남명 조식의 정신을 잇는다는 뜻으로 경의(敬義)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 벽한정 용연서원에서 조선 선비의 기운을 느끼다, 합천여행 공식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travelhc/221309226218 -> 책판들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도난과 파손의 위험 때문에 2008년에 합천박물관으로 옮겼다. (서원인지, 벽한정인지..)
- 용연서원, 서원연합회 http://seowonstay.com/bbs/board.php?bo_table=slist&wr_id=977&page=9 -> 영모재 이온의 용연사(합천 용연사 항목 있음)와 정보 혼재되어 있으므로 후반부 내용만 참고 / 1664년(현종 5)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인(朴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714년(숙종 40) 문동도(文東道)를 추가배향하였다. 1691년(숙종 17) ‘용연(龍淵)’이라고 사액되었다. 그 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에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용연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9607 -> 1662년(현종 3)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인(朴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714년(숙종 40) 문동도(文東道)를 추가 배양하였다. 1691년(숙종 17) ‘용연(龍淵)’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1867년(고종 4)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그 뒤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3칸의 사우, 3칸의 조계정사(釣溪精舍), 3칸의 벽한정(碧寒亭), 정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박인과 문동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조계정사는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던 곳으로 사용되어왔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소장 유물로는 문집 목판 281판 등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3,500평, 임야 9,000평 등이 있다.
- [향토사 연구]남명학(南冥學)의 발원지 “합천 벽한정”을 아십니까?, 합천인터넷뉴스, 2016.6.11. http://m.hcinews.asia/view.asp?intNum=5619&ASection=001015 -> 박인 사후 19년 뒤인 1658년(효종 9년) 박인의 제자인 홍기범, 심일삼, 송필원 등의 주도로 용연서원이 건립되었다. 이후 숙종 17년 1691년 우리나라 최초 서원 건립자인 주세붕 족현손되는 주채(周寀. 1660-1690)를 필두로 서원 창건 30여년 만에 합천을 비롯한 인근지역 유림 800여명이 연명으로 청액소를 올렸지만 대북의 영수인 정인홍 출신지역이라는 이유로 사액을 받지 못했으며(???다른 자료들에는 사액을 받았다고 되어 있으므로 사실관계 확인 필요함) 대원군 사원철폐 당시 훼철되었다.
- 96. 무민당 박인, 경남일보, 2002.8.26. http://www.gnnews.co.kr/news/oldArticleView.html?idxno=30252 -> 인물 행적 상세 ; 55세 때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는 삼전도의 국치를 당하자 거처하는 곳의 이름을 무민당(无悶堂)이라고 고치고 문을 절호문(節戶門)이라고 하였다. 무민당이라는 말은 정묘·병자호란 끝에 정월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쳤고 ‘대개 나가지 아니하면 허물이 없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 무민당의 행장은 간송 조임도과 임곡 임진부가 지었다. 효종 10년(1658)에는 사림들이 유덕을 기려 용연서원(龍淵書院)을 창건하여 배향하였다. / 현재 벽한정에는 경의(敬義)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남명의 정신을 잇겠다는 뜻의 표현이다. 기자는 벽한정을 나오면서 ‘유촉비문’을 읽으면서 무민당의 남명학 계승 노력을 다시금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