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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효정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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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t1166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1월 28일 (목) 17:26 판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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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효정각
Hyojeonggak Commemorative Pavilion, Hapcheon
합천 효정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합천 효정각
영문명칭 Hyojeonggak Commemorative Pavilion, Hapcheon
한자 陝川 孝貞閣
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중앙로 26-3 (쌍백면)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79호
지정(등록)일 2009년 10월 22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시대 대한제국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합천 효정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효정각은 조선 초기의 문신인 효정공 경제 정옥량(孝貞公 耕齊 鄭玉良, 1395~1447)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효자각이다.

효정공의 어머니가 생전에 대추를 좋아하였는데 공이 날마다 뜰의 대추나무를 잡고 울자 대추나무 일곱 그루가 다시 돋아나 흰 열매를 무성히 맺다가 6년 만에 말라죽었다. 마을사람들은 효심에 감탄하여 그를 ‘백조당(白棗堂)’이라고 불렀다.

1516년(중종 11)에 효정각을 세워 효행의 표본으로 삼았는데, 보호각은 앞면 1칸, 옆면 1칸으로, 뒷면에만 벽체를 두었을 뿐 나머지 3면에는 모두 살창으로 처리하여 외부에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효정각은 일각문(一角門)과 보호각을 담장으로 두른 일반적인 형태로 정려각(旌閭閣) 건축형식의 모범이 된다.

영문

Hyojeonggak Commemorative Pavilion, Hapcheon

This pavilion was built to commemorate the filial piety of the civil official Jeong Ok-ryang (1395-1447).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commemorative plaques or steles were bestowed by the government to honor a person’s patriotic loyalty, filial devotion, or matrimonial devotion and were meant to be hung on red gates or in pavilions in front of the honored family’s home.

Jeong devotedly took care of his widowed mother and even after death performed food offerings to her every morning and evening. In every offering, he included jujube, which his mother used to like. But once during winter, his jujube stock ran out, so he went to the garden and cried every day. After a while, seven jujube trees sprouted there and bore abundant fruit, but after six years, when Jeong himself passed away, the trees too dried up and died.

This pavilion was originally built in 1516 when a commemoration was bestowed to Jeong Ok-ryang. The current pavilion was reconstructed in 1897. It features a wall at the back and wooden windows* in the front, and on the sides, which allows to see the inside of the pavilion. The pavilion houses a commemorative plaque and a stele engraved with an inscription Hyojari**, meaning "the village of a filial son."

  • That’s what 살창 was translated like in other texts but in this case, it’s not exactly a window, I guess…
    • How do we explain what Hyojari means? Did the king rename the village after him or sth? And is it a stele or sth like a 정표? I couldn’t find any photos.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 정옥량(1395-1447)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정옥량은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를 위한 음식을 차렸다고 한다. 어머니가 생전에 대추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대추를 함께 차렸는데, 겨울이 되어 대추가 떨어지자 날마다 뜰에서 울었다. 그러자 뜰에 대추나무 일곱 그루가 자라났고, 열매를 무성히 맺다가 6년 뒤 정옥량이 죽자 나무도 곧 말라 죽었다고 한다.

1516년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가 내려졌고, 정려각이 지어졌다. 현재의 정려각은 189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뒷면에만 벽체를 두고, 나머지 삼면을 살창으로 처리하여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정려각 안에는 정려 현판이 걸려 있으며, '효자리'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참고자료

  • 합천 효정각,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4790000&pageNo=1_1_1_1 -> 내부 사진 및 설명 참조.
  • 영지요선삼가신구읍지, 한국유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sy1851&logNo=221691783555&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directAccess=false -> 정옥량: 자는 곤보, 호는 경재 또는 백조당. 초계정씨로 야은 길재의 문인으로 벼슬하여 하양 현감이 되었다. 성품이 지극히 효도하여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어머니가 죽으니 장례와 제례의 예를 다했고, 3년 뒤까지 조석으로 상식하여 그 몸을 마칠 때까지 계속했다. 어머니가 생시에 성품이 대추차(조다)를 즐겼으므로 상식할 때 반드시 이를 썼다. 마침 임술년 겨울에 대추가 다하여 드리지 못하고 사당의 마당에 엎드려 울었더니, 하룻밤 사이에 대추나무 7주가 갑자기 생겨 몇 자 높이로 자랐는데, 하얀 열매가 맺혔기에 따서 차를 끓여 올리기 무릇 6년이었다. 공이 돌아가시는 날, 대추나무도 역시 말라죽어 순상(순찰사, 관찰사) 홍숙이 조정에 아뢰어 정려와 복호(면세)를 명령했다. 사실이 ‘삼강록’과 ‘여지승람’에 기록되고, 호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는 효정공이다. 평천사에 향례한다.
  • 정옥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608 -> 성품이 지효(至孝)하여 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고, 사후에는 장례와 시묘는 물론 종신토록 상식(上食)을 올렸다. 사당 옆에 홀연히 흰 대추나무 일곱 그루가 돋아 한자 남짓 자랐는데, 시인(時人)이 효심에 감응하여서 난 것이라고 하였다. / 뒤에 효행의 표본으로 『삼강행실』과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었다. 1516년(중종 11) 정려가 세워지고, 1689년(숙종 15)에는 사림들이 평천(平川)에 사(祠)를 세우고 제향하였으며, 1701년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경재문집』이 있다.
  • 합천군 평구리 쌍백면 – 문화유적 설명 중 https://www.hc.go.kr/04960/05111/07130.web -> 백조당(白棗堂)은 정옥량(鄭玉良)의 사우(祠宇)로 모친(母親)이 병색에 들어서 대추미음을 끓여 봉양하든 중 한겨울에 대추가 떨어져서 미음을 끓일 수가 없어 정성을 다해 하늘에 빌고 나니 흰 대추가 열려서 미음을 끓여 병간호를 하였다하여 백조당(白棗堂)이라 한다. 정옥량(鄭玉良)은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문하생으로 성삼문, 백팽년, 하위지, 유성원 등과 친교가 두터우며 세종 때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봉직랑행하양현감(奉直郞行河陽縣監)에 임용되었으며,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수록되어 있고 음지마을에 위치한 백조당(白棗堂)에서 후손은 매년 음력 정월보름날 제를 올리고 있다. ; 대추 일화 조금 다르게 설명.
  • 고전번역DB 신증동국여지승람 수록 내용 -> 정옥량(鄭玉良) 벼슬은 하양 현감(河陽縣監)이었는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본현 유린리(有麟里)에 살면서 어미를 봉양하였다. 어미가 죽자 장사와 제사를 예로 하고, 3년 뒤에도 죽을 때까지 돌아가신 부모의 신위에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렸다. 사당 옆에서 갑자기 흰 대추나무 일곱 가지가 나서, 두어 자쯤이나 되더니 6년 만에 말라 죽었다.
  • 초계정씨 합천 쌍백 집성촌, 2016년 11월 대사성공파 종회 정기총회, 민초나라,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ngyeong49&logNo=22087467438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인물 설명 간략, 정려각 외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