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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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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ndsey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1월 24일 (일) 16:34 판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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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대표명칭 처인성
한자 處仁城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43번지
지정(등록) 종목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지정(등록)일 1977년 10월 13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처인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고려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첩지

고려 고종 19년(1232) 12월 고려군과 몽골군이 경기도 용인 처인성에서 벌인 전투.

이 해 1월 제1차 고려·몽골 전쟁의 강화교섭이 성립되어 몽골군이 후퇴한 이후 몽골은 고려에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의 최고집권자였던 최우는 강화도에 천도하여 몽골의 침략에 끝까지 항전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6월 17일 강화천도를 단행하고 고려에 파견되었던 몽골의 다루가치 및 군인들을 살해하거나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

이에 몽골은 그해 8월 다시 살리타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고려 침공을 재개하였다. 10월 안북성에 군사를 주둔시킨 살리타는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고 자신은 제4군을 이끌고 개경을 지나 임진강을 건너 한양성을 함락시키고 11월 중순에는 광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그 주력을 용인으로 전진시켰다. 살리타는 제4군의 주력을 강화도 맞은 편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는 한편, 자신은 일부 병력을 거느리고 처인성으로 남진하였다. 처인성은 당시 수주(水州:수원)에 속한 곳으로서 양인보다 천대받던 신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둘레 약 400m의 작은 토성으로 이때 처인성에서는 용인을 비롯한 인근 각 고을에서 피난온 군민과 승장 김윤후를 비롯한 승병들이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12월 16일 몽골군은 살리타의 지휘하에 처인성을 공격하였으나, 처인성 동문 밖 언덕에 매복하여 있던 고려군은 몽골군을 기습하여 살리타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고려군은 이때를 틈타 공격을 가하여 지휘관을 잃어 전열이 걷잡을 수 없이 와해된 몽골군을 대파하였다.

처인성전투는 몽골과의 전쟁이 발발한 이래 고려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전쟁 발발 이래 시종일관 패세를 면치 못했던 고려는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The Battle of Cheoinseong Fortress

The Battle of Cheoinseong Fortress was a decisive Korean victory that took place in late 1232 amidst the Mongol Empire's second campaign to invade Goryeo (918-1392). During the battle, the commander of the invading Mongol troops, General Saritai, was killed by the Korean civilian troops defending the fortress. This shocked the Mongol Empire, turned the course of the war in Korea's favor, and led to a temporary peace treaty and the withdrawal of troops, thus making it one of the most important Korean victories during the Mongol invasions (1231-1259).

Mongol during the Goryeo period (918-1392) at Cheoinseong Fortress in Yongin, Gyeonggi-do Province. It was the largest victory of Korean troops against the Mongols during the Mongol invasions (1231-1259).

-- went to Cheoinseong Fortress

Cheoinseong Fortress was a relatively small earthen fortification measuring 400 m in circumference. Inside the fortress was a village for people from the lowest social class. Due to the Mongol invasions, around 1,000 refugees and 100 Buddhist monks from the nearby area had also sought refuge here at the time of the battle.

Led by a monk named Kim In-hu, the civilians living at the fortress strategically positioned themselves on a hill outside the east gate of the fortress to ambush the Mongol troops as they came to attack. It was during this ambush that General Saritai was shot by an arrow and killed. Kim In-hu was later offered a high post i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s but declined the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