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저존재
합천 저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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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합천 저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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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陜川 著存齋 |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두방길 91 (적중면, 제실)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8호 |
지정(등록)일 | 2009년 11월 19일 |
분류 | 유적건조물 |
시대 | 대한제국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합천 저존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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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저존재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노계 안우(蘆溪 安遇, 1449~1527)⋅뇌곡 안극가(磊谷 安克家, 1547~1614) 선생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1868년(고종 5)에 선생들의 위패를 모신 송원서원(松原書院)이 철거되자 선생들의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05년에 탐진 안씨(耽津 安氏) 문중의 후손들이 이곳에 사당과 재숙(齋宿)을 위한 건물들을 새로 지어 ‘저존재’라 하고 지금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다.
- 불천위(不遷位) :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제사를 지내는 것.
- 재숙(齋宿) : 제관이 재실에서 밤을 지내는 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 안우(1449-1527)와 안극가(1547-1614)의 제사를 모시는 재실이다.
안우는 1518년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안국(金安國)의 추천으로 벼슬에 나갔으며, 효행으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안극가는 1591년 과거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형이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자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적진으로 들어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두 사람의 위패는 본래 1692년에 세워진 송원서원에 모셔져 있었는데, 1869년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서원이 철거되었다. 이에 1905년 탐진안씨 문중에서 이곳에 사당과 제사 준비를 위한 건물들을 지었다.
경내에는 대문채, 재실, 사당, 비각, 장판각, 관리사 등의 건물이 있으며, 경사지에 위치한 탓에 단을 나누어 기단을 쌓은 후 그 위에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중심건물인 저존재는 중앙의 대청을 기준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건물 전면에 툇마루를 단 구조이며, 건물 향좌측 끝에는 단차를 두고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시설했다.
참고 자료
- 합천 저존재,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3413804880000 -> 저존재는 대문채, 재실, 사당, 비각, 장판각, 관리사, 화장실 각 1동씩과 협문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배치는 북향하고 있는 언덕 기슭에 전면에 좁은 집입로를 두고 방형의 담장으로 둘러쳐진 영역을 이루었다. / 일반적인 재실의 규모를 넘어서는 공간구성으로 세 단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심건물인 저존재를 기준으로 전후의 영역성이 잘 조성되어 있으며, 건축의 구성이 재실의 수준에서 충실한 형식을 이루고 있다.
- 송원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0978 -> 1692년(숙종 1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우(安遇)·노필(盧㻶)·안극가(安克家)·노극성(盧克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1952년에 복원되었다가 그 뒤 소실되었다. 당시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강당, 신문(神門), 3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었다. 묘우에는 안우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노필·안극가·노극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다.
- 안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5%88%EC%9A%B0&ridx=1&tot=19
- 안극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5%88%EA%B7%B9%EA%B0%80&ridx=0&to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