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죽죽비
합천 죽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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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합천 죽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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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陜川 竹竹碑 |
주소 |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152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
지정(등록)일 | 1974년 12월 28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기/ 보호각 1동 |
웹사이트 | 합천 죽죽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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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이 비는 642년(신라 선덕여왕 11) 대야성(大耶城) 전투에서 전사한 죽죽(竹竹)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시 백제장군 윤충의 기습으로 대야성이 함락되자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은 부하인 죽죽의 만류를 뿌리치고 항복하였고, 백제군이 항복하러 나온 사람들마저 모두 죽이자 김품석은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그러나 죽죽은 남은 병사를 거느리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죽죽의 이런 충절(忠節)과 용맹을 들은 선덕여왕은 그에게 급찬(級찬)의 관등을 내리고, 그 처자들을 왕도(王都)로 옮겨 살게 하였다. 높이 1.4m, 폭 54cm의 화강암으로 세운 이 비석은 죽죽의 충절을 기리고, 그 뜻을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1645년(인조 23)에 합천군수 조희인(曺希仁)이 건립하였다. 비문은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1591~1658)가 지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624년 대야성 전투에서 전사한 신라의 병사 죽죽의 충절을 기려 세운 것이다.
죽죽은 백제의 기습으로 대야성이 함락되자 성주 김품석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병사를 이끌고 끝까지 대항하다가 전사했다. 선덕여왕은 그의 충절을 인정하며 관직을 내리고, 그의 가족들을 왕도에 옮겨 살게 하였다고 한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은 1644년/1645년에 당시 합천에 부임했던 조희인(1578-1660)이 죽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비문은 강대수(1591-1658)가 지었다.
비각은 1935년에 수리되었으며 죽죽과 관련한 기록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 비각 왼쪽에는 1970년에 세워진 찬양단비(讚揚短碑)가 있고, 오른편에는 2016년 합천군에서 죽죽을 기리며 세운 사당인 충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 비석 세운 시기 -> 기존 설치 안내판 1644년 / 작업용 제공 안내판 1645년 – 확인 후 확정 필요.
참고 자료
- 신라의 충신 죽죽의 충절을 기린 합천 죽죽비, 지역N문화 https://ncms.nculture.org/archival/story/4683?jsi= -> 비각은 1935년 이준호(李駿浩) 등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기록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1970년 합천청년회의소에서 비각의 왼쪽에 찬양단비(讚揚短碑)를 세웠다.
- 신라 충신 죽죽비와 충장사, 흐르는 물처럼,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hjoo5504&logNo=22129543988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비석 사진, 충장사 사진
- 조희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27_005498 -> 인물 생몰년 / 경상남도 문화재DB(지자체 제공 조사자 의견) 및 합천군 문화관광 홈페이지에는 건립 시기를 1522년/1525년으로 적어 놓았음 –> 강대수의 문집에 있는 비문 내용의 년도를 1525년으로 잘못 해석했기 때문으로 보임. 강대수의 생몰년만 보아도 해당 년도 불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