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옥봉고분군
진주 옥봉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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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진주 옥봉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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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 玉峰 古墳群 |
주소 | 경남 진주시 옥봉동 산546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 |
지정(등록)일 | 1974년 2월 16일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
수량/면적 | 97㎡ |
웹사이트 | 진주 옥봉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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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진주 옥봉고분군은 진주시가지 동편에 있는 수정봉과 옥봉에 있는 가야시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지배세력의 무덤이다.
기록에 의하면 수정봉과 옥봉의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7기의 큰 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도시화로 3개의 무덤만 흔적이 남아있다. 3개의 무덤 중에서 옥봉에 있는 1개의 무덤만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7개의 가야시대 무덤은 1910년경 일본인 세끼노[關野貞]에 의해 도굴에 가까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일본 동경대학(東京大學)에 보관되어 있다. 출토된 유물은 철제 말갖춤과 각종 토기류 등인데 유물의 규모와 종류 등을 통하여 가야시대 진주지역을 지배하던 지배충의 세력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옥봉 고분군은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가야의 무덤이다.
기록에 의하면 옥봉 정상부에서 시작된 능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7기의 큰 무덤이 있었다고 하며, 이 중 3기의 무덤이 1910년대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발굴되었다.
지금은 도시 개발 등으로 인해 2기만 남아있으며, 이 중 옥봉에 있는 무덤 1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2007년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이 무덤은 석곽묘 형태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9점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이 일대의 지배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10년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발굴된 수정봉에 있는 무덤 2기와 옥봉에 있었던 무덤 1기 역시 이 지역 지배층의 것으로 보인다. 석실묘 형태로 축조되었으며, 철제 마구, 각종 토기류, 가락바퀴, 구슬류, 무기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 대부분은 일본 동경대학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 자료
- 진주 옥봉 고분군, 진주 관광 https://www.jinju.go.kr/02793/02258/02284.web?amode=view&idx=413 -> 원래 대형의 봉토분 7기가 분포되어 있던 이 고분군 일대는 일제시대 이래 고분의 파괴와 함께 개간이 진행되어 지금은 단 2기의 고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가야 자료 총서 4권 - 가야 발굴조사 자료편 Ⅱ,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pp.396-397 -> 발굴조사 간략 정보 ; 2007년 진주 옥봉 금산공원 옆 도시계획도로 개설로 인해 동서문물연구원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조사 결과, 삼국시대 수혈식석곽묘 1기가 확인되었고,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9점이다. 석곽묘는 등고선과 평행하게 조영되었고 장축방향은 동-서향이며 규모는 376㎝×105㎝×38㎝로 세장방형이다. 최하단석 축조에 있어 3벽은 점판암계 판석을 사용하여 수적하였고, 서단벽은 할석으로 평적하였다. 장벽의 최하단석은 기초 홈을 파서 수적한 후 그 위로 2단 이상을 평적하여 조성하였다. 출토유물은 동단벽쪽에서 소가야계의 대부완, 파배가 각각 1점씩 출토되었으며, 서단벽쪽에서 대가야계의 개배 6세트와 방추차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소가야계와 대가야계 유물 양상으로 석곽묘의 조성 시기는 6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 가야 자료 총서 2권 - 가야 일제강점기 자료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pp.77-84 -> 1910년 발굴조사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