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진주 옥봉고분군

HeritageWiki
이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2월 9일 (수) 19:18 판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진주옥봉고분군.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0010000 진주 옥봉고분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진주 옥봉 고분군

진주 옥봉 고분군

진주 옥봉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 옥봉 고분군
한자 晋州 玉峰 古墳群
주소 경남 진주시 옥봉동 산546번지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
지정(등록)일 1974년 2월 16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수량/면적 97㎡
웹사이트 진주 옥봉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진주 옥봉고분군은 진주시가지 동편에 있는 수정봉과 옥봉에 있는 가야시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지배세력의 무덤이다.

기록에 의하면 수정봉과 옥봉의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7기의 큰 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도시화로 3개의 무덤만 흔적이 남아있다. 3개의 무덤 중에서 옥봉에 있는 1개의 무덤만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7개의 가야시대 무덤은 1910년경 일본인 세끼노[關野貞]에 의해 도굴에 가까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일본 동경대학(東京大學)에 보관되어 있다. 출토된 유물은 철제 말갖춤과 각종 토기류 등인데 유물의 규모와 종류 등을 통하여 가야시대 진주지역을 지배하던 지배충의 세력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옥봉 고분군은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가야의 무덤이다.

기록에 의하면 옥봉 정상부에서 시작된 능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7기의 큰 무덤이 있었다고 하며, 이 중 3기의 무덤이 1910년대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발굴되었다.

지금은 도시 개발 등으로 인해 2기만 남아있으며, 이 중 옥봉에 있는 무덤 1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2007년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이 무덤은 석곽묘 형태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9점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이 일대의 지배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10년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발굴된 수정봉에 있는 무덤 2기와 옥봉에 있었던 무덤 1기 역시 이 지역 지배층의 것으로 보인다. 석실묘 형태로 축조되었으며, 철제 마구, 각종 토기류, 가락바퀴, 구슬류, 무기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 대부분은 일본 동경대학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 자료

  • 진주 옥봉 고분군, 진주 관광 https://www.jinju.go.kr/02793/02258/02284.web?amode=view&idx=413 -> 원래 대형의 봉토분 7기가 분포되어 있던 이 고분군 일대는 일제시대 이래 고분의 파괴와 함께 개간이 진행되어 지금은 단 2기의 고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가야 자료 총서 4권 - 가야 발굴조사 자료편 Ⅱ,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pp.396-397 -> 발굴조사 간략 정보 ; 2007년 진주 옥봉 금산공원 옆 도시계획도로 개설로 인해 동서문물연구원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조사 결과, 삼국시대 수혈식석곽묘 1기가 확인되었고,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9점이다. 석곽묘는 등고선과 평행하게 조영되었고 장축방향은 동-서향이며 규모는 376㎝×105㎝×38㎝로 세장방형이다. 최하단석 축조에 있어 3벽은 점판암계 판석을 사용하여 수적하였고, 서단벽은 할석으로 평적하였다. 장벽의 최하단석은 기초 홈을 파서 수적한 후 그 위로 2단 이상을 평적하여 조성하였다. 출토유물은 동단벽쪽에서 소가야계의 대부완, 파배가 각각 1점씩 출토되었으며, 서단벽쪽에서 대가야계의 개배 6세트와 방추차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소가야계와 대가야계 유물 양상으로 석곽묘의 조성 시기는 6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 가야 자료 총서 2권 - 가야 일제강점기 자료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pp.77-84 -> 1910년 발굴조사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