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전공비
김시민 전공비 |
|
대표명칭 | 김시민 전공비 |
---|---|
한자 | 金時敏 戰功碑 |
주소 | 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
지정(등록)일 | 1972년 2월 12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김시민 전공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국문
김시민 전공비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왜적을 물리쳐 공을 세웠으나 그 과정에서 사망한 김시민의 전공을 새긴 비석이다.
선조 25년(1592) 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장수들과 의병, 백성들이 힘을 합쳐 3,800명의 군사로 2만여 명의 왜적을 물리치고 진주성을 온전히 지킨 과정을 기록해 놓았다. 대략적인 내용은 김시민이 뛰어난 전략으로 왜적을 물리쳤으나 죽은 척 숨어 있던 왜병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그 뒤 나라에서 공훈을 인정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이름을 올린 사실을 밝힌 것이다.
전공비는 진주 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따라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남이흥(南以興)이 광해군 11년(1619)에 세웠다. 글은 성여신이 짓고 글씨는 한몽인이 썼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1592년 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꾼 후 순국한 김시민(1554-1592)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김시민은 2만 명이 넘는 왜적이 진주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4천 명이 안 되는/38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해 6일 간의 접전 끝에 진주성을 지켜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시민은 전투 과정에서 왜군의 총에 맞았고, 며칠 후 상처가 깊어져 죽었다.
이후 진주 목사로 부임한 남이흥이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1619년에 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성여신(1546-1632)이 지었고, 글씨는 한몽인이 썼다.
현재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있다. 비각 뒤에는 전주성 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1987년에 세워진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다.
- 비각 언제 세워졌는지 확인 필요함.
- 1차 진주성 싸움(‘진주성대첩’)은 1592년 이순신이 지휘한 한산도대첩과 1593년 권율이 지휘한 행주대첩과 함께 큰 승리를 거둔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 진주성 싸움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길목이 되던 이곳을 지킴으로써 왜적의 호남진출을 막아내어, 불리했던 당시의 상황을 뒤집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 성여신의 문집 『부사집(浮査集)』에 ‘진주목사김공전성각적비명(晋州牧使金公全城却敵碑銘)’으로 되어 있어서 ‘진주전성각적비(晋州全城却敵碑)’라고도 불린다.
- 인물 행적 정보
- 김시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9%80%EC%8B%9C%EB%AF%BC&ridx=0&tot=8
- 김시민 장군, 그의 죽음에 통곡하다, 브레인미디어, 2016.6.21. http://www.brainmedia.co.kr/BrainLife/18088
- 기본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