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담 정려비
정담 정려비 Stele of Jeong D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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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정담 정려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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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of Jeong Dam |
한자 | 鄭湛 旌閭碑 |
주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255-1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0호 |
지정(등록)일 | 1999년 12월 30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정담 정려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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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정려비는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 효자, 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세우는 비다.
정담은 조선 명종 3년(1548)에 평해군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야성(野城)이고 자는 언결(彦潔)이다. 24세에 영남동도병마사의 비장(裨將)이 되었다. 그 후 1583년 오랑캐를 소탕할 때 돌격장이 되어 큰 공을 세웠다. 1583년 35세 때 무과에 합격하여 회령, 경원판관, 오위도총부 도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제 군수로 웅치에서 육탄전으로 싸우다가 45세에 전쟁터에서 죽었다.
숙종 16년(1690)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 나무로 만든 비를 세웠고, 정조 5년(1782) 마을 앞에 돌로 만든 비를 다시 세웠다.
영문
Stele of Jeong Dam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무신이자 의병장인 정담(1548-1592)의 충절을 기려 내려진 정려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웠다.
영덕 출신인 정담은 1583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같은 해 함경도 지역에서 여진족이 침입했을 때 이를 진압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김제 군수로 재직중이었으며, 웅치(지금의 완주와 진안 사이의 고개)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려 1593년 병조참판에 추증하였고, 1690년 정려를 내렸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정려비를 세웠다가 1782년 지금의 돌로 만든 비를 세웠다. 정려비는 받침돌,몸돌, 둥근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자료
- 정담정려비", 경북북부권문화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