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영덕 우경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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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1722년(경종 2) 박중상(호: 虞卿)이 생활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박중상은 무안박씨 경수당(慶壽堂) 박세순의 후손이다. 박세순은 임진왜란 당시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된 인물이다.

이 집은 18세기 영덕지방 중상류층의 생활공간이 잘 유지되어 있어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가치가 있다. 현재까지도 후손이 거주하며 지속적으로 집을 관리하고 있다.

1차 수정

우경고택은 무안박씨 21대손인 우경 박중상(虞卿 朴重相, 1692~1752)이 1722년 경에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우경고택이 자리한 원구마을에는 1500년대 초반 박양기와 박영기 형제가 이주하면서 무안박씨가 세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우경고택은 마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박중상은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적선여경(積善餘慶: 선행을 쌓아 자손들에게 복을 미침)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가묘방의 설치에서 보여준다. 사랑방의 배면에는 조상에 대한 존숭(尊崇)과 분가 가옥이 갖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가옥 내 가묘방을 두었다.

우경고택은 앞쪽의 사랑채와 뒤쪽의 안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는 전형적인 경북 북부지방의 가옥 형태를 보인다. 사랑채는 왼쪽의 마루와 오른쪽의 사랑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랑방 오른쪽에는 안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는 출입구가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도방, 안방, 부엌이 있고 왼쪽에는 상방, 고방, 가묘방으로 구성되었다. 가옥 내 도장, 고방, 정지, 마구, 사랑방 등의 다양한 곳에 수장 공간을 두었다.

이 집은 18세기 영덕지방 중상류층의 생활공간이 잘 유지되어 있어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가치가 있다. 현재까지도 후손이 거주하며 지속적으로 집을 관리하고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이러한 신념은 가묘방의 설치에서 보여준다. 사랑방의 배면에는 조상에 대한 존숭(尊崇)과 분가 가옥이 갖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가옥 내 가묘방을 두었다.
    • 오른쪽에는 도방, 안방, 부엌이 있고 왼쪽에는 상방, 고방, 가묘방으로 구성되었다. 가옥 내 도장, 고방, 정지, 마구, 사랑방 등의 다양한 곳에 수장 공간을 두었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우경고택은 박중상(朴重相, 1692~1752)이 1722년 경에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현재까지 박중상의 후손이 거주해 왔다.
    • 우경고택은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 전형적으로 분포하는 ㅁ자 평면으로, 뒤쪽의 안채와 앞쪽의 사랑채를 익랑과 행랑으로 연결하였다. 안채의 규모가 사랑채보다 크고 안방 뒤에 마루방(도장방)을 두는 등 고식의 흔적이 확인된다. 전면의 사랑채를 사랑채와 이어진 행랑보다 높게 짓고 사랑마루를 외부로 돌출시켜 사랑채가 발달하기 시작한 과도기의 모습도 확인된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오류 사항없음.

2차 수정

우경고택은 무안박씨 21대손인 우경 박중상(虞卿 朴重相, 1692~1752)이 1722년 경에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우경고택이 자리한 원구마을에는 1500년대 초반 박양기와 박영기 형제가 이주하면서 무안박씨가 세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우경고택은 마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박중상은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적선여경(積善餘慶: 선행을 쌓아 자손들에게 복을 미침)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우경고택은 앞쪽의 사랑채와 뒤쪽의 안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는 전형적인 경북 북부지방의 가옥 형태를 보인다. 사랑채는 왼쪽의 마루와 오른쪽의 사랑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랑방 오른쪽에는 안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는 출입구가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고 있으며, 오른쪽의 안방 앞에는 부엌이 있다.

이 집은 18세기 영덕지방 중상류층의 생활공간이 잘 유지되어 있어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가치가 있다. 현재까지도 후손이 거주하며 지속적으로 집을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