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의기사
진주 의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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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진주 의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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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晉州 義妓祠 |
주소 |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
지정(등록)일 | 1983년 7월 2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진주 의기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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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의기사는 제2차 진주성 싸움(1593년)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의기 논개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이다.
의기사는 1740년(영조16)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세웠는데 수차례 고쳐 지었고, 지금의 사당은 1956년 진주의기창렬회에서 힘을 모아 고쳐 지은 것이다. 의기사 현판은 관찰사 이지연(李止淵)이 썼고, 진주기생 산홍(山紅)과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시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기문이 걸려 있다.
논개의 영정은 처음에는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영정이 모셔져 있었으나 친일 논쟁으로 철거하고 지금은 2007년 표준영정심의위원회에서 통과되어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은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임진왜란 때 순국한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1593년에 벌어진 2차 진주성 전투 끝에 성이 함락되자 왜군들의 잔치에 참여해 술에 취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녀의 행적은 지역에서 구전되어 오다가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 기록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의기사는 이 지역에 관리로 부임한 남덕하(1688-1742)가 조정에 건의해 1740년 처음 세워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한국전쟁으로 불에 타 사라졌던 것을 1956년/1960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현판의 글씨는 1823년 중수에 참여했던 이지연이 쓴 것이며, 정면에 진주 기생 산홍의 시와 조선 말기의 유학자 황현의 시, 정약용의 기문을 새긴 나무판이 걸려 있다.
안에는 원래 김은호(1892-1979)가 그린 영정이 모셔져 있었는데, 작가의 친일 논쟁 때문에 2005년에 철거되었다. 이후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된 지금의 영정을 새로 제작해 2008년에 봉안하였다.
-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 의기사는 홍화보가 1779년에, 홍백순와 이지연이 힘을 합해 1823년에, 정현석이 1868년에 각각 중수했다. (상세하게 쓸 것인지..?)
- 복원 시점 확인 필요 -> 대부분 1956년이라 설명하고 있으나, 진주문화대전에서 1960년으로 설명.
- 정면에 걸려있는 나무판은 총 3개이다. 좌측이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완용을 꾸짖었다는 기녀 산홍의 시판이다. 중앙에 있는 것은 정약용의 기문을 새긴 것으로, 정약용은 1779년에 의기사를 중건한 홍화보의 사위이다. 우측은 매천 황현의 시판이다.
- 촉석루 경내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참고 자료
- 진주성 의기사에 논개 표준영정 봉안, 연합뉴스, 2008.5.22. https://www.yna.co.kr/view/AKR20080522112200052 -> 논개 영정 교체 관련 기사
- 논개영정 그린 김은호는 누구?, 위클리 서울, 2005.5.13. http://www.weeklyseoul.net/news/articleView.html?idxno=11723 -> 작가 친일 논란 관련 기사
- 디지털진주문화대전 http://jinju.grandculture.net/Contents?local=jinju&dataType=98&callFunc=goSearch()%3B&keyword=%EC%9D%98%EA%B8%B0%EC%82%AC -> 기본 정보들 ; 의기사는 1721년(경종 원년)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이 진주지역민 등의 요구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건립되었다. 1779년(정조 3)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낡고 부서진 곳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고, 사위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게 「의기사기」를 지어 걸도록 하였다. 또한 1823년(순조 23) 진주목사 홍백순(洪百淳)과 경상감사 이지연(李止淵)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춘추(春秋)로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후 6·25전쟁으로 의기사는 완전 소실되었다가 1960년 사단법인 진주고적보존회가 재건하여 현재의 건물로 유지되고 있다.
- (참고) 국내 유일 여성제례 '의암별제' 150년 전 그대로 되살렸다, 연합뉴스, 2018.5.27 https://www.yna.co.kr/view/AKR20180527050900052 -> 정현석은 1868년 의기사를 보수하면서 논개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녀들의 가무가 연희되는 의암별제를 신설해 매년 6월에 제사를 봉행하게 했다. 제관과 연희자를 모두 여성이 담당하는 의암별제는 1992년 성계옥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이후 ‘진주논개제’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