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창열사
HeritageWiki
진주 창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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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진주 창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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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晉州 彰烈祠 |
주소 | 경남 진주시 남성동 212-8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
지정(등록)일 | 1983년 7월 2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수량/면적 | 7동 |
웹사이트 | 진주 창열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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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창렬사는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싸움(1593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지켰던 분들을 모시기 위해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였는데 1607년(선조40)에 사액*을 받은 사당이다.
그 후 충무공 김시민을 모신 충민사가 헐리면서 충무공 김시민도 이곳에 모시게 되어 충무공 김시민을 비롯한 39위(位)를 모시고 있다.
사당은 정사(正祠), 동사(東祠), 서사(西祠), 경충당(景忠堂), 비각(碑閣) 등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 사액(賜額) :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창열사는 임진왜란 중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사당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살아남은 47개소 중 하나이다.
1607년 경상도 지역에 관찰사로 부임했던 정사호(1553-1616)가 사액을 받아 건립했다.
이곳에는 1593년 벌어진 2차 전주성 전투에서 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의병장 김천일(1537-1593) 등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었다. 이후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괴산 충민사가 없어질 때 김시민(1554-1592) 장군의 위패도 이곳으로 옮겨왔다.
현재 총 39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린다.
경내에는 3동의 사당 건물을 비롯해 비각, 내삼문, 외삼문 등 총 7동의 건물이 있다.
참고 자료
- 관군과 백성이 함께 싸운 진주성전투 전사자들의 진주 창열사, 지역N문화, 역사문화유산 https://ncms.nculture.org/confucianism/story/2718 -> 창열사(彰烈祠)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두 차례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39인을 배향하는 곳으로 진주성 안에 있다. 진주성전투는 1592년 10월의 1차 전투와 1593년 6의 2차 전투가 있었다. 창열사가 설립될 당시에는 2차 전투의 전사자였던 김천일을 배향하는 곳이었고 1차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김시민의 사당인 충북 괴산의 충민사(忠愍祠)가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훼철되자 김시민의 위패를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배향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을 포함해 창열사에는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39명의 선현을 배향하고 있다.
-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0050000&pageNo=1_1_1_1 -> 기본 내용
- 창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413-> 배향인물 39인 목록.
-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 창렬사, 쏠쏠한 일상,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jkks&logNo=7011192616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정사호가 ‘1595년’ 건립했다는 설명 있으나 오류임 ; 정사호는 1607년 경상감사로 제수되었음(조선왕조실록 기사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4002022_001 확인) / 1712년 최진한(1652-1740)이 중수했다. ; 이 내용도 오류인 듯. 조선왕조실록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ta_10102004_001)에서는 1721년에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다고 함.)
- 창렬사의 실체, 조열태의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oultae&logNo=20158846602&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당시 진주성 성주와 부성주였던 서예원과 성수경이 배향되지 못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