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선조사제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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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선조 사 제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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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진주 선조 사 제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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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 宣祖 賜 祭文碑 |
주소 | 경남 진주시 상대1동 592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8호 |
지정(등록)일 | 2002년 8월 14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기(基) |
웹사이트 | 진주 선조사제문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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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진주선조사제문비는 1594년(선조29)년 국왕이 최영경*(崔永慶:1529~1590)에게 내려준 치제문(致祭文)을 1821년(순조21)에 돌에 새겨 세운 빗돌이다.
처음에는 산청의 덕천서원에 세웠다가 최영경이 세상을 피해 공부하던 이곳으로 옮겼다.
최영경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제자로 정여립 모반사건에 휘말려 1590년에 감옥에서 죽었는데, 1591년 무죄로 밝혀졌다.
이 사제문비는 영남사림파의 대표였던 정인홍(鄭仁弘)이 역적으로 몰려 약해져 가던 영남사림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중흥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화유산의 하나이다.
- 최영경(1529~1590): 호 수우당(守愚堂), 조식의 제자로 학문으로 수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정여립 모반사건에 휘말려 감옥에서 죽었으나 신원이 회복되어 대사헌에 추정되고 덕천서원에 모셔졌다. 『수우당실기』가 전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선조가 최영경(1529-1590)에게 하사한 제문을 돌에 새긴 것이다.
최영경은 조선 중기의 저명한 유학자 조식(1501-1572)의 제자였으며, 1589년의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1590년 감옥에서 죽었으나 이듬해 무죄로 밝혀져 신원이 회복되었다.
선조는 1594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하사했고, 이 글을 1821년 돌에 새겨 비석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최영경 등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산청 덕천 서원의 마당에 세웠는데, 1902년 이후 최영경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강서당 경내로 옮겨왔다.
지금은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호하고 있으며, 비각 안에 있는 2기의 비석 중 흰 몸돌로 된 것이 사제문비이다.
이 비석은 당시 세력이 약해졌던 경상 지역 선비들의 명예 회복을 상징하는 문화 유산 중 하나이다.
- 덕천서원: 1576년(선조 9)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최영경, 하항 등 사림(士林)들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 조식유적지(사적 305) 내에 있다.
- 비각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음.
- 비각 안 오른쪽 검은 몸돌 비석은 최영경의 신도비로 추정됨.
참고 자료
- 목암(木巖)에 잠든 처사 최영경, 고양신문, 2016.9.12. http://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40231 -> 현재 수우당의 위패는 그가 생전에 건립했던 경남 산청 덕천서원에 남명선생과 함께 배향돼 있고, 그가 강학을 펼쳤던 진주 선학산 기슭 도강서당에는 선조대왕의 사제문비(賜祭文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378호)가 있다. 저서로는 ‘수우당 실기’, ‘수우당 최영경’ 등이 있다.
-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3780000&pageNo=1_1_1_1 -> 이 비석은 원래 1821년 덕천서원의 마당에 세웠던 것으로, 이것은 남명(南冥) 조식(1501∼1572)에 대한 정조사제문비를 세우는 것과 같이 이루어졌다. 1796년 정조는 남명 조식에 대하여 친히 제문을 내려 그 학덕을 추모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해 강우(江右) 지역 학자들이 1623년의 인조반정과 1728년의 무신란 이래 쇠잔해진 문풍을 크게 일으키게 되었다. 1902년까지 덕천서원 마당에는 남명 조식에 대한 정조사제문비와 수우당 최영경에 대한 선조사제문비가 각각 동쪽과 서쪽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남명에 대한 정조사제문비는 없어졌고, 수우당 최영경에 대한 선조사제문비는 이 도강서당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