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자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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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자천대는 원래 옥구군 선연리 하제포구의 작은 바위산을 말한다.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노닐며 독서했던 곳이라 전한다. 바위산 위에 정자가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정자를 허물었고, 1934년 옥구군수 최학수가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선연리에 정자를 다시 세웠다. 이후 옥구향교가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 경현재라 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자천대(紫泉臺)라는 이름은 바위산 옆의 연못이 항상 붉어서 붙은 이름이다.
자천대는 전면 3칸·측면 1칸의 2층 누마루집으로 팔작지붕을 올렸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에 자천대와 관련한 전설이 실려 있다. 자천대에는 두 개의 돌 항아리가 있었는데 최치원이 태수를 지낼 때 항아리 안에 비밀문서를 감춰두었다고 한다. 돌 항아리를 끌어당겨 움직이면 바다에서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주민 수백 명이 큰 밧줄로 항아리를 끌어당겨 비를 불렀다. 하지만 사신들이 옥구현에 올 때마다 가서 구경하느라 옥구의 백성들이 괴로웠다. 이에 정자를 허물고, 돌 항아리도 땅에 묻었다고 한다.
1차 수정
자천대는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노닐며 독서했던 곳이라 전한다.
원래 이 정자는 옥구군 선연리 하제포구의 작은 바위산 위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정자를 허물었고, 1934년 옥구군수 최학수가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선연리에 정자를 다시 세웠다. 이후 옥구향교가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자천대라는 이름은 바위산 옆의 연못이 항상 붉어서 붙은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자천대에는 두 개의 돌 항아리가 있었는데 최치원이 태수를 지낼 때 항아리 안에 비밀문서를 감춰두었다고 한다. 돌 항아리를 끌어당겨 움직이면 바다에서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주민 수백 명이 큰 밧줄로 항아리를 끌어당겨 비를 불렀다. 하지만 사신들이 옥구에 올 때마다 가서 구경하느라 백성들이 괴로워졌고, 이에 정자를 허물고 돌 항아리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1
- <신동국여지승람>(1530)은 “자천대(紫遷臺)는 서쪽 해안에 있는데, 지세가 넓고 펀펀하며, 샘과 돌이 좋아 즐길 만하다.라고 했으므로 해안가에 불쑥 나온 바위산 이름에 비롯되었다.
- 원래 이 정각(亭閣)은 옥구군 선연리 하제포구의 작은 바위산 위에 있었다. 조선 후기 17세기경에는 정각은 없고 바위산만 있었다. 1934년 옥구군수 최학수가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정각을 다시 세웠다.
- 분야별 자문위원2
- 『디지털군산문화대전』에서는 자천대를 “1934년 군용비행장 안으로 편입되자 당시 유림들과 최학수 옥구 군수가 이를 옥구 향교로 옮기고”라고 하였음.
- 일제 강점기 신문기사에서는 1934년 신축이 확인됨.
- 현 옥구향교 자천대 안내문에는 “1941년 경 일본군의 군산비행장 건설공사로…옥구향교 인근으로 이전하였으며 1964년 현 장소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되어 있음.
- 1934년에 신축된 자천대와 현재의 자천대는 형태가 달라 보임. 현재의 자천대는 높은 석제 주초 위의 누각 구조이나 1934년에 신축한 자천대의 누하주는 지금보다 낮고 석제 주초도 아닌 듯함.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이후 옥구향교가 있는 지금의 자리로(지금의 자리로-뒤의 ‘지금의’와 겹침->이 자리로) 옮겼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 사신들이 옥구에 올 때마다 가서 구경하느라(구경하느라->구경하였기 때문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괴로워졌고, 이에 정자를 허물고 돌 항아리도 땅에 묻었다고 한다.
2차 수정
자천대는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노닐며 독서했던 곳이라 전한다.
원래 이 누각은 옥구군 선연리 하제포구의 작은 바위산 위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허물었고, 1934년 옥구군수 최학수가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다시 세웠다. 이후 옥구향교가 있는 이곳으로 옮겼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자천대라는 이름은 바위산 옆의 연못이 항상 붉어서 붙은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자천대에는 두 개의 돌 항아리가 있었는데 최치원이 태수를 지낼 때 항아리 안에 비밀문서를 감춰두었다고 한다. 돌 항아리를 끌어당겨 움직이면 바다에서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주민 수백 명이 큰 밧줄로 항아리를 끌어당겨 비를 불렀다. 하지만 사신들이 옥구에 올 때마다 가서 구경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워졌고, 이에 정자를 허물고 돌 항아리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자천대 이전 관련
『디지털군산문화대전』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군용 비행장 건설로 인해 ‘선연리에 있는 정자를 옥구향교로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1934년 군용 비행장 안으로 편입되자 당시 유림들과 최학수 옥구 군수가 이를 옥구 향교로 옮기고….”) 하지만 자료 조사결과 1934년은 자천대 정자를 ‘선연리에 신축한 해’로서 비행장과 관련하여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래 (1)~(4)를 참고해 주십시오.
(1) 자천대 누정이 있었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 옥구현, ‘누정’ 항목에 수록
(2) 18세기 자천대 누정 헐어버림.
- 이중환, 『택리지』, 전라도 -> 100년 전 자천대 허문 일과 관련 이야기
(3) 19세기 자천대 ‘누정’ 항목이 아니라 ‘고적’ 항목에 수록
- 『호남읍지』(1871년), 옥구현
- 『호남읍지』(1895년), 옥구현
(4) 1934년 6월 선연리에 옥구군수 최학수가 신축함.
- 매일신보 1934년 6월 10일 기사 「자천대 낙성 백일장 개최」
- 매일신보 1934년 6월 21일 기사 「자천대 낙성식 백일장 거항」
- 동아일보 1934년 6월 11일 기사 「고운선생의 遊賞讀書地 자천대[寫](群山)」
- 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9일 기사 「고운선생의 유상지, 자천대 정각 건축, 옥구 일반유지의 활동으로, 낙성식에 백일장도 겸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