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추원재
상주 추원재 Chuwonjae Ritual House, Sa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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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상주 추원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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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Chuwonjae Ritual House, Sangju |
한자 | 尙州 追遠齋 |
주소 | 경상북도 상주시 나한양범길 294 (이안면)외 1필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4호 |
지정(등록)일 | 2010년 3월 1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민간신앙/기타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곽(2동) |
웹사이트 | 상주 추원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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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상주 추원재는 진주 강씨 찬성공파 문중의 재실이다. 재실은 묘소 또는 사당 근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보통 관리인을 두어 묘소, 문중 소유의 산과 땅을 관리하고, 제사에 참석하는 후손들이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할 때 재실에서 제사를 지낸다. 숙종 30년(1704)에 강영숙(?~1504)과 네 아들의 묘 아래에 그 후손인 강진, 강로, 강석경이 세웠다. 순조 30년에 건물이 무너진 것을 후손들이 수리했고, 2011년에 문간채, 담장, 협문을 정비했다. 추원재의 방과 대청에 단 문의 형태와 크기, 방에 문짝을 달기 위한 틀의 짜임새는 당시의 제작기술을 선명히 보여준다. 또한, 조선 후기 재실과 묘의 위치 관계 및 기능과 용도에 따른 건축적 특성을 살필 중요한 자료이다.
건물의 터는 묘 아래의 산비탈 지형을 이용해 2단으로 닦았다. 윗단에 재실, 아랫단에 솟을대문의 문간채가 수평을 이루며 남동쪽을 향하고 있다. 돌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지어진 재실은 앞면이 4칸, 옆면이 2칸이고, 넓은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대칭해 겹으로 배열했다. 각 방의 기둥 밖에는 좁게 깐 쪽마루가 있고, 방 뒷벽에는 벽을 뚫고 문을 달아 공적인 서류를 보관하는 벽장과 조그만 방인 반침을 만들었다. 재실의 앞 열에만 굵은 둥근 기둥을 세웠고, 처마의 무게를 받는 대들보는 기둥이 직접 받치고 있다. 지붕의 뼈대는 대들보, 종보와 함께 서까래를 받치는 나무인 도리가 5줄로 걸리는 오량가의 형태로 되어 있다. 문간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온돌방과 헛간을 대칭으로 배열한 앞면이 5칸, 옆면이 1칸인 솟을대문 모양이다.
영문
Chuwonjae Ritual House, Sangju
This is a ritual house for the preparation of ceremonial rituals and maintenance of the tombs of Kang Youngsook (?-1504) of Jinju Kang Clan(’s Chanseonggong family? 찬성공파?) and his four sons. It was built in 1704. The tombs of Kang Youngsook, his wife and his sons are located in the mountain behind the ritual house.
Kang Youngsook was the official who served the prince in the royal palace, but during the Literati Purge of 1504, he was struck by misfortune together with his father and his two younger brothers. His wife Lady Yi carried his coffin with her four sons and two daughters to the region of Yeongnam. While she was living with her parents she made the tomb for Kang Youngsook there in Yangbeom-ri. While living there, Lady Yi gave her children education and restored the family’s wellbeing.
Using the sloped land, Chuwonjae Ritual House was built on two tiers, with the gate quarters being on the lower level and the ritual house on the higher level. As time passed by, the ritual house fell into decay so it was reconstructed in 1839 on a high stone elevation. The building features a large wooden-floored hall in the center with underfloor-heated rooms on each side and narrow wooden-verandas on both sides of the building. The behind wall of the room was drilled and a small door was installed in order create a closet to store documents. The gate quarters features the main gate in the center with underfloor-heated rooms and storehouses on each side.
영문 해설 내용
진주강씨 찬성공파 문중에서 강영숙(?-1504)과 네 아들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704년에 지은 재실이다. 재실 뒷산에 강영숙과 부인 이씨의 묘와 네 아들의 묘가 있다.
강영숙은 궁궐에서 세자를 모시던 관리였는데, 1504년 사화 때 아버지, 두 동생과 함께 화를 입었다. 부인 이씨가 남편의 관을 받들고 네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영남 지역에 있던 친정으로 가던 중에 이곳 양범리에 강영숙의 묘를 만들었다. 이후 이씨는 상주 지역에 살면서 자식들을 교육하고 가문을 회복시켰다.
추원재는 비탈진 지형을 이용해 2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랫단에는 문간채, 윗단에는 재실이 있다. 재실은 시간이 흘러 퇴락해진 것을 1830년에 중건하였고, 돌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지어졌다. 넓은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고, 건물 양옆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방 뒷벽에는 벽을 뚫고 문을 달아 서류를 보관하는 벽장을 만들었다. 문간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과 헛간을 대칭으로 배열했다.
참고자료
-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5640000&pageNo=1_1_1_1 -> 추원재는 진주강씨 찬성공파 종중 재사로 1704년에 강영숙(?~1504)과 그 장자 호·차자 택·삼자 온·사자 준의 묘역 아래에 후손 강진·강로·강석경이 건립하였다. 현재 묘제를 지내고 묘소의 수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회합을 도모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창건 이후 1830년 퇴락해진 건물을 문중 사람들이 뜻을 모아 재물을 보태어 중건하고 그 상량문을 대청 상부 종도리에 밀봉해 놓았다.
- 성주시 읍면동 - 이안면 https://www.sangju.go.kr/dong/board/detail.tc?mn=3513&mngNo=589&boardNo=639376 -> 양범리 31번지에 있다. 진주 강씨(晋州姜氏) 재실로 1704년(숙종 30) 강영숙(姜永叔)과 네 아들의 묘 아래 재실로 후손들이 건립했다. 1770년(영조 46) 중건하고, 추원재라고 이름을 고쳤다 한다. 뒷벽에는 받침과 벽장을 달았다. 상부가구는 건실한 5량가이며, 온돌방과 마루방의 사이 벽에는 앞. 뒤칸마다 창호를 달리했다. 솟을 삼문은 가운데 대문, 좌우에는 헛간과 온돌방이 대칭되게 배치했다.
- 강씨 족보 http://kangssi.kr/soyun/in-9hwi.htm -> ‘강영숙’ 정보
- 좌찬성 강영숙과 아들 강온 묘, 자연지리 수맥감정 학회, 네이버 카페 https://cafe.naver.com/ksg5647/57 -> 강영숙은 대사간 강형(1450-1504)의 장자이다. 강형은 1504년에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위하고 신주를 묘에 안치하는 데 반대하다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세 아들과 사위인 허반까지 함께 화를 당했다. 부인 익산 이씨는 시신을 수습해 친정이 있는 상주로 향했고, 이곳에서 꿈을 꾼 후 유해를 안장하고 입석리에 자리잡았다. 중종반정 이후 시아버지와 남편이 복권되었고 1533년 셋째 아들인 강온이 의정부사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