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돌성
금돌성 Geumdolseong Fort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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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금돌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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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Geumdolseong Fortress |
한자 | 今突城 |
주소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산98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1호 |
지정(등록)일 | 1985년 8월 5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수량/면적 | 3,227,107㎡ |
웹사이트 | 금돌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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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금돌성은 백화산 정상인 한성봉을 포함한 산등성이와 계곡을 가로질러 차단성, 내성, 외성을 돌로 쌓은 산성이다. 백화산맥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와 계곡을 가로질러 쌓았다. 성벽은 대개 안팎을 똑같이 쌓아올렸고, 그 외는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을 그대로 이용하는 등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 성안에는 건물과 성벽을 따라 나 있는 출입문, 적의 움직임을 살피던 망루, 군 시설의 터 등이 남아 있다. 둘레는 외성이 약 1.9㎞, 내성이 약 4.2㎞로 전체는 6.2㎞ 정도이다. 1978년에 국방유적 보수사업으로 80m의 성벽을 복원하였다.
문헌에 고려 시대에는 금돌성, 상주산성으로, 조선 시대에는 상주 백화산성, 고석성, 금돌성, 백화산성, 백화고성, 보문성 등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7년에 백제 정벌 시 전진기지로 사용했고, 『고려사』, 『동국통감』에는 몽고 침입 시 황령사 승려 홍지가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 『대동지지』, 『상산지』에는 둘레 1,904척, 계곡 1곳과 샘 5곳 등 성의 규모와 시설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금돌성은 삼국 시대에는 신라의 백제 정벌 전진기지로, 고려 시대에는 몽고군 공격에 대항했던 역사적 산성으로서 우리나라 지역 산성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영문
Geumdolseong Fortress
영문 해설 내용
금돌성은 백화산(해발 933m) 정상인 한성봉과 주변의 골짜기를 둘러 쌓은 석성이다. 삼국시대인 6세기 경 신라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 지역은 신라와 백제의 접전지였으며, 신라의 북쪽 진출을 위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성벽은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을 그대로 이용하는 등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만들어졌고, 동쪽은 지대가 낮은 점을 보완하기 위해 외성을 쌓았다. 외성의 남쪽과 동쪽, 내성의 남쪽과 북쪽에 성문터가 남아 있고, 성 안에서는 망루와 수문 등 여러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건물지 주변에서 기와와 그릇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둘레는 외성이 약 1.9km, 내성이 약 4.2km로 전체는 6.2km 정도이다. 대부분의 성벽이 파괴되어 있었는데, 1978년 성벽 80m를 복원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이 백제를 정벌할 때 이 성을 행궁으로 사용했고, 상주 지리에 밝았던 장군 김유신(595-673)이 이곳을 백제군과의 전투를 위한 거점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인 1254년에는 승려 홍지가 이끄는 민병이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에 맞서 이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 상주 금돌성 지표조사보고서,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1. -> 기초 정보 확인
-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3413701310000 -> 성은 완전하게 무너진 것을 1978년에 국방유적 보수사업으로 80m의 성벽을 복원하였다. 무너진 성벽은 약 4m 폭으로 쌓여 있었으며, 총 연장 둘레는 2∼3㎞이다. 골짜기를 내려오는 성벽의 일부는 약 30㎝ 정도의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복원된 성벽은 밑부분의 폭이 360㎝이며, 150㎝ 정도의 높이에 군사들이 서서 활동할 수 있는 단을 설치하고, 거기서 다시 아랫폭 125㎝, 윗폭 85㎝의 성벽을 150㎝ 높이로 쌓아 올렸다.
- 모동 반계 포도마을 http://podo.invil.org/index.html?menuno=2207&lnb=50101 -> 상주는 신라 시대 북방 경략을 위한 군사요지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특히 백제와는 더욱 더 많은 지역이 연접되어 있어서 서역은 항상 접전지가 되어있었다. 이 곳 산성을 세분하면 석문, 내외 성지, 옥문곡, 대궐터, 창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차도가 개설되기 전의 구로였고 신라시대 중요한 교통로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 상주문화원 http://www.sjcc.or.kr/bbs/board.php?bo_table=2_e&wr_id=118&page=5 -> 수봉리 옥동서원에서 앞개울을 건너 북쪽 계곡을 따라 올라 가면 외성지가 나서고 여기서 1.5km 쯤 더 가면 보문곡이다. 그 위에 대궐이 있었으므로 그 입구의 문이라는 뜻에서 붙혀진 속명이다. 지금도 이 골짝에서는 양쪽 산등성이로 곳곳에 성지가 있다. 성곽의 형식은 내성과 외성, 차단성, 토루로 구분하였는데 백화산 어귀에 차단성을 쌓고 성문을 마련하였으며, 외성은 보문곡에 접어들면 시작된다.
- (호국의 성지 상주 .1) 백화산 호국의 길, 영남일보, 2019.5.27.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90527.010120753350001 -> 금돌산성은 백화산성, 상주산성, 보문성, 금돌성이라고도 한다. 산성이 자리잡은 백화산은 백제와 끊임없이 대치하던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또한 상주행군대총관을 수년간 역임했던 김유신은 상주의 지리에 밝았다. 이를 헤아려 학계에서는 치밀한 장기적 계획 하에 주 공격로를 개설하고 금돌산성을 삼국통일의 전진기지로 활용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성곽 내부에 있는 대궐 터는 서기 660년, 태종무열왕이 백제와의 마지막 일전을 위해 황산벌로 떠나는 김유신을 배웅하던 지휘소였다고 한다. 이후 무열왕은 금돌산성에서 백제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 낭만적 이데아, 네이버 블로그 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jk3108&logNo=22097061952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실제 산성 사진(건물지, 안내판 등) 확인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