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학부 묘비

HeritageWiki
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0월 26일 (월) 16:41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최학부 묘비
Tombstone of Choe Hak-bu
전북역사문화학회, 최학부 묘비, 전라북도 금석문 대계 2 (2008), pp.473-479.
대표명칭 최학부 묘비
영문명칭 Tombstone of Choe Hak-bu
한자 崔學富 墓碑
주소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산302
지정(등록) 종목 향토문화유산 제4호



해설문

국문

비문의 주인공 최학부의 자는 문백(文伯)이다. 1816년(순조 16)에 7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비문의 내용 중 “진안의 이북면 적천마을(현 부귀면 적천마을) 옛 웅치의 제일 높은 봉우리 동쪽 기슭 건좌에 묘를 썼다”라는 대목이 있으므로 이 내용으로 미루어 이 일대가 임진왜란 당시의 웅치 전적지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조선 후기에 무안현감, 강원도관찰사, 병조참판 등을 지낸 한익상(韓益相, 1767~1846)이 지었다.

영문

Tombstone of Choe Hak-bu

This is the tombstone of Choe Hak-bu (1740-1816), who was known for his filial piety and brotherly love.

Its inscription was composed in 1821 by Han Ik-sang (1767-1846), the magistrate of Muan and a close friend of Choe Hak-bu’s son Choe seol, and calligraphed by Choe Seol. It was erected in 1828 by his grandson Choe Seung-u.

The inscription sheds light onto the former name of the area, which is referred to as Ungchi Pass. This mountain pass connects Wanju and Jinan and was the site of a fierce battl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 인물 최학부(1740-1816)의 묘비이다. 최학부는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비문은 아들 최설과 절친한 사이였던 무안현감 한익상(1767-1846)이 1821년에 지었으며, 최설이 글씨를 썼다. 이후 1828년 손자 최승우가 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의 내용 중에는 웅치라는 고개 이름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어 옛 지명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자료가 된다. 웅치는 완주와 진안을 잇는 고개의 지명으로, 이곳에서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참고자료

  • 최학부 묘비,『전라북도 금석문 대계 2』, 전북역사문화학회, 2008, pp.473-479. (https://www.earticle.net/Article/A130538) -> 이미지 출처, 비문 전문 확인 / 한익상은 최설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무안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최설의 부탁으로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 웅치전적지, 디지털완주문화대전 http://wanju.grandculture.net/wanju/toc/GC07000471 -> 웅치전투는 금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1592년 7월 7일부터 8일까지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와 진안군 부귀면 일대에서 벌어진 웅치전투를 비롯해, 7월 9일에 완주군 소양면 일대와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산정동 일대에서 벌어진 안덕원전투를 포함하는 것이다. / 웅치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서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웅치전적지는 2016년 『웅치·이치전적지 기초자료 정밀조사』 과정에서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에 의해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 이용엽 임진왜란 웅치전적지의 옛 지명을 밝혀낸 금석문 - 진안 부귀 세동리 崔學富의 묘비, 이용엽, 『전라금석문연구』 8‧9, 2006. -> 특히 이 지역은 임진왜란으로 이곳을 지키던 의병들이 순절한 곳이다. 시신이 온 산에 널려있었고 전선이 무너졌지만, 적의 주력도 상실되어 왜군은 전주성 침공을 포기하고 후퇴했다고 한다. 그 후 이 길은 행인들이 접근하기를 꺼려 기피하던 고개로, 문중에서 묘를 쓰면서 자칫 묘의 실전을 우려해 당시의 관행으로는 파격적인 내용을 적었다고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