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원(흥선대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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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0월 18일 (일) 20: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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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원(흥선대원왕)
Heungwon Royal Tomb
흥원(흥선대원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흥원(흥선대원왕)
영문명칭 Heungwon Royal Tomb
한자 興園(興宣大院王)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
지정(등록) 종목 경기도 기념물 제48호
지정(등록)일 1978년 10월 1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왕실무덤/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흥원(흥선대원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흥원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묘이다. 1863년 철종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자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후에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대원군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대전회통(大典會通)》 등 법전을 정비하고, 왕의 외척이 국가를 운영하던 정치기관인 비변사를 없앴다. 그리고 조선 시대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는 한편 새로운 군사 기관인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하였다. 또한 세제를 개혁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였으며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경복궁을 새로 고쳤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고 청을 제외한 일본 및 서양에 나라 문을 강력히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나라 간에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병인양요, 1866년)와 미군(신미양요, 1871년)을 격퇴하였고, 새로운 방식의 국교 관계를 체결하려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집권 10년 만에 명성황후와의 권력 다툼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청에 납치되어 4년간 갇혀있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원래 1898년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공덕동에 있었으나 1908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하면서 흥원으로 격상되었다. 이후 1966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영문

Heungwon Royal Tomb

This is the tomb of Yi Ha-eung (1820-1898), a descendant of King Injo (r. 1623-1649) and the father of King Gojong (r. 1863-1907)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In 1864, when King Cheoljong (r. 1849-1863) died without an heir, Yi’s 11-year-old son was selected to become king. Yi ruled on behalf of his son as prince regent until 1873 and was given the title Heungseon Daewongun, by which he is widely known today.

Serving as the head of the government, Yi Ha-eung revised national codes and disbanded the Border Defense Command, which had been under the control of the king’s in-laws. He also revived the function of the State Council and organized a new military organization called Three Commands to have administrative and military affairs handled by different agencies. His achievements included the reform of the taxation system to strengthen the state treasury and the rebuilding of Gyeongbokgung Palace. He persecuted Catholics and adopted a policy of isolationism, closing all ports of Korea to foreign imperial powers. He fought against – and defeated – the French and U.S. forces that had invaded in 1866 and 1871, respectively, and also rejected the demand of Imperial Japan to open the country’s ports.

This tomb was originally built in today’s Gongdeok-dong area in Seoul in 1898 and was moved to Paju in Gyeonggi-do Province in 1908. It was moved again to its current location in 1966 due to the construction of a U.S. military base. In front of the tomb mound are a stone table, a stone lantern, stone pillars,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and stone statues of sheep and horses.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 인조(재위 1623-1649)의 후손이자 고종(재위 1863-1907)의 아버지인 이하응(1820-1898)의 무덤이다. 1864년 철종(재위 1849-1864)이 후계 없이 승하하자, 이하응의 11살 아들이 왕이 되었다. 이하응은 1873년까지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하였고,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다.

이하응은 국정을 운영하면서 법전을 정비하고, 왕의 외척이 운영하던 정치기관인 비변사를 없앴다. 그리고 조선시대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는 한편 새로운 군사 기관인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하였다. 또한 세제를 개혁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였으며 경복궁을 새로 고쳤다. 한편 천주교를 탄압하고 나라 문을 강력히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조선에 쳐들어온 프랑스(병인양요, 1866년)와 미군(신미양요, 1871년)을 격퇴하였고, 일본의 개항 요구를 거부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원래 1898년 지금의 서울 공덕동에 있었으나 1908년 경기도 파주로 이장되었다. 1966년 파주에 미군기지가 지어지면서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봉분 앞에는 상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석양, 석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