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성김씨 학봉종택
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이 집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살았던 곳이다. 학봉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로 성리학에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조선 선조(宣祖) 2년(1568)에 병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계승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봉의 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아 물이 들어오자 영조(英祖) 38년(1726)에 이 곳에서 100m 떨어진 곳으로 자리로 옮겼다. 그러나 1964년 다시 원래의 자리인 지금의 위치에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 두어 소계서당(邵溪書堂)으로 쓰도록 하였다. 안채는 오른쪽 3칸이 대청이고, 왼쪽 2칸이 안방이며 그 끝이 부엌이다. 이 건물은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종택으로서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의성김씨학봉종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과 그 종손들이 거주해온 종가이다. 김성일은 이황(李滉, 1501~1570)의 수제자로 1590년 통신부사로서 일본에 다녀 온 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그 책임을 물어 서울로 압송하던 중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김성일은 의병을 모으고 군량미를 확보하는 등 초유사의 책임을 다했으며, 1593년 진주성에서 병사하였다.
김성일은 원래 의성김씨 종가가 있는 안동 천전리(내앞)에 살았다. 1582년 7월 처가가 있던 ‘검제’라 불리던 이곳 금계(金溪)로 분가하였다. 학봉종택은 지대가 낮고 집 앞에 개천이 있어 침수피해가 잦았다. 1762년 김성일의 8세손 김광찬은 종택을 이곳에서 15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종택 자리에 소계서당을 세웠다.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 자리인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소계서당을 사랑채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 학봉종택은 서남향을 하고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정침은 ㅁ자 형태이다.
정침 뒤에 있는 사당에는 김성일의 불천위 신주가 모셔져 있다. 불천위 신주는 나라에 큰 공로가 있거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의 신주를 말한다. 불천위의 자격을 얻으려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불천위 신주로 인정받으면 4대(代)가 지나도 신주를 무덤으로 옮겨서 묻지 않고 영원히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 사랑채 우측 운장각에는 김성일이 사용했던 안경과 벼루 등의 유품과 보물 제905호, 906호로 지정된 고서와 고문서 503점이 보관되어 있다.
1차 수정
학봉종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과 그 종손들이 거주해온 곳이다.
김성일은 이황(李滉, 1502~1570)의 수제자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1590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2년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경상도 지역에서 의병을 모으고 군량미를 확보하는 등 침략군과의 전쟁에 투신하였으며, 진주성에서 항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김성일은 원래 의성김씨 종가가 있는 안동 천전리에 살았는데, 1582년 7월 처가가 있던 이곳 금계로 분가하였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피해가 잦았기 때문에 1762년 15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 자리로 옮기면서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 두어 서당으로 쓰도록 하였다.
학봉종택은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진 정침, 사당, 별채인 풍뢰헌, 유물관인 운장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에는 김성일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원래 유교식 제사에서는 고조부까지 4대에 이르는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게 되어있는데, 나라에 큰 공로가 있거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4대가 지나더라도 신주를 영원히 사당에 모시는 것이 허락되었다. 운장각에는 김성일이 사용했던 안경, 칼, 벼루 등의 유품과 고서 및 고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