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락정
침락정 Chimnakjeong Pavilion |
|
대표명칭 | 침락정 |
---|---|
영문명칭 | Chimnakjeong Pavilion |
한자 | 枕洛亭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9-1 |
지정(등록)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40호 |
지정(등록)일 | 1973년 8월 3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침락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국문
2018
이 건물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으며 의병장이던 김해(金垓)의 아들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가 조선 현종(顯宗) 13년(1672)에 건립하여 의병 출신의 선비들을 모아 회의를 열던 정자이다. 매원은 광해군(光海君)의 어지러운 정치를 피해 이 곳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중앙의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 2칸이 배치되어 있다. 정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사에 가까운 평면구조를 보인다. 대청 뒤쪽에 운암정사(雲巖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2020
침락정은 의병대장 김해(金垓)의 아들인 김광계(金光繼, 1555~1593)가 1608년에 세운 정자이다. 다른 이름으로 운암정사(雲巖精舍)라고도 한다.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김광계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제자이며, 젊어서부터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인조(1623~1649 재위)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시켰다. 이후에는 고향에 은거하며 말년을 보냈다.
침락정은 학문을 토론하거나 시를 지으려고 모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대청 안쪽에는 ‘운암정사(雲巖精舍)’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사’는 수양과 공부의 장소로 지은 건물을 말하고, ‘운암’은 김해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연(金緣)의 호이다.
침락정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크기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인데 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에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영문
Chimnakjeong Pavilion
2018
This pavilion was constructed by Kim Gwang-gye (1580-1646). His father, Kim Hae (1555-1593), was a leader of a civilian arm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1592-1598). Later, in 1627 and 1636, Kim Gwang-gye himself also raised a civilian army to fight against the Manchu invasions.
The overall layout of this pavilion is close to that of a lecture hall, consisting of a wooden-floored hall at the center and two rooms with under-floor heating at either end. It is said that Kim Gwang-gye used to hold meetings at this building with local scholars who had joined his army.
This pavilion was relocated to the current site in 1974 due to the construction of the Andong Dam. It was originally located in Ocheon-ri, Yean-myeon.
영문 해설 내용
2020
침락정은 의병대장 김해(金垓, 1555~1593)의 아들인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1608년에 세운 정자이다.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김광계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제자이며, 젊어서부터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인조(1623~1649 재위)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시켰다. 이후에는 고향에 은거하며 말년을 보냈다.
침락정은 학문을 강론하거나 시를 짓기 위한 모임을 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대청 안쪽에는 ‘운암정사(雲巖精舍)’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사’는 수양과 공부의 장소로 지은 건물을 말하고 ‘운암’은 김해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연(金緣, 1487~1544)의 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