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양진당
상주 양진당 Yangjindang House, Sa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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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상주 양진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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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Yangjindang House, Sangju |
한자 | 尙州 養眞堂 |
주소 | 경북 상주시 낙동면 양진당길 27-4 (승곡리) |
지정(등록) 종목 | 보물 제1568호 |
지정(등록)일 | 2008년 7월 1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상주 양진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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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상주 양진당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정(1555~1636)이 지은 풍양 조씨의 종갓집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옛 선조의 집터에 장남인 조기원에게 공사감독관을 맡겨 집안의 관례에 따라 총 100여 칸의 건물을 완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양진당은 조선 후기 살림집의 지역적 특성 및 역사적 변화과정을 살피고, 당시의 건축 기술이 잘 드러나 있어 그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건물은 1932년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화재, 홍수 등으로 훼손되어 ‘ㄷ’자 모양의 본채만 남았다. 2004년과 2010년에 없어진 건물 터를 발굴하여 본채의 중문간과 사랑채, 사당 등을 찾아내고 옛 모습대로 새로 지었다. 동쪽의 제일 높은 구역에 사당이 있고, 그 앞에 있는 양진당, 서쪽으로 ‘ㅁ’자 모양의 본채가 있는 점이 조선 후기 경상도 지역 종갓집의 보편적인 형태이다. 본채는 2층집에 6칸씩의 방과 대청이 겹으로 배치됐다. 계단과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창과 문이 다양한 형식과 크기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처마 서까래가 독특한 짜임새와 모양을 가지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양진당은 임진왜란 때 상주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정(1555-1636)이 지은 풍양 조씨 문중의 종택 건물이다. 종택이란 한 집안의 종가가 대대로 사는 집이다.
이 집은 1626년 공사를 시작해 1628년 완공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옛 선조의 집이 있던 자리에 장남 조기원이 공사 감독을 맡아 집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후 1807년부터 1년간 중수했으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교육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50년대에 태풍과 홍수, 화재 등으로 훼손되어 ‘ㄷ’자 모양의 본채만 남았었는데, 1980년과 2000년대에 총 4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해 본채 건물의 구조가 완전한 ‘ㅁ’자형이었다는 점과 본채 외 다른 건물들의 자리가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2005년에는 본채 정면에 문간채가, 2007년에는 본채 동편에 조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복원되었다.
정침은 동쪽에 대청이 있고 서쪽에 앞뒤로 배치된 온돌방이 모여 있는 구조이다. 단층 건물이지만 경사가 있는 주변 지형의 특성상 전면부의 바닥을 2m가량 높였으며, 난방을 위해 구들을 설치했고, 툇마루 앞에는 난간을 달았다. 툇마루 전면에 세운 부재는 위는 원형이고 아래는 사각형으로 다르게 되어있다.
건물에 출입하기 위한 계단은 완전한 2층으로 된 양쪽 익사에만 설치되어 있다. 동쪽에는 정침과 연결된 툇마루가 달려 있고, 서쪽에는 위층에 다락을 올린 부엌이 있다.
- 조정은 임진왜란 때 상주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전쟁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제사와 후손들의 학문 연구와 독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안동에 있던 처가의 99칸 가옥을 옮겨 양진당을 지었다고 한다.
- 대문채로 복원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본채에 들어가기 위한 문이고 대문채가 별도로 있었다고 하므로 문간채로 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함.
참고 자료
- 상주 양진당 정밀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1 -> 1921년 조태연이 개설한 낙운사숙을 옮겨와 ‘조명강습소’로 운영했으나 1923년 현 낙동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문을 닫았다. / 1952년 태풍으로 대문간채(현재 대문간채의 앞에 또 대문간채가 있었다고 함)가 유실되었고 1957년 화재로 사당이 소실되었으며, 1966년 홍수로 대문간채와 사랑채가 유실되었다. / 1981년부터 해체 후 복원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정침과 사주문, 담장이 새로 세워졌고 2004년 시굴조사 후 2005년 대문채가 복원되었고, 2007년에는 사당이 복원되었다. 2012년 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 본래 지금의 대문채 앞에 실질적인 대문 역할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태풍으로 사라진 건물이 이것이다. / 양진당 건축 과정에서 ‘충헌’과 ‘복방’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현재 양진당 구성의 고상식 겹집 형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고상식 방 앞으로 툇마루가 길게 이어져있고, 전면에 세워진 기둥이 아래는 사각, 위는 원으로 서로 다른 가공형태로 되어 있다. (‘낭무, 서가래’ 등의 용어로 표현) / 양쪽 익사는 완전한 2층이고 정침은 반층 위에 구성되어 있다. 주생활 공간의 바닥을 지면에서 2m 정도 높게 해 난방을 위한 구들과 대청을 설치한 것은 보기 드문 사례이며, 동서 익사는 중층 구조로 하부에 헛간 광이 있고 상부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집의 뒤쪽은 경사가 있고 앞쪽은 낮기 때문에 건물을 정면에서 보면 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있지만 담장 밖에서 집 뒤를 바라보면 단층의 건물처럼 보인다. / 서쪽에는 상부에 다락이 설치된 부엌이 있다. / 정침과 양쪽 익사, 대문채의 지붕 높이가 모두 다르다.
-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715680000&pageNo=1_1_1_1 -> 기본 정보 : 상주 양진당은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1626년 지은 것으로 양진당 중수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종도리에서 기록이 나온 것으로 보아 1807년(순조 7)에 중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상주 양진당은 전체적으로 정면 9칸, 측면 7칸의 규모의 ‘ㅁ’자형 평면을 한 고상식 건물로서 퇴칸 전면에 세운 6개 기둥은 통재를 사용하였는데, 특이하게 하층부분에는 방형으로 치목하고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었다. 지붕은 정침의 툇마루 상부만 겹처마로 하고 나머지는 홑처마로 하였는데, 겹처마의 경우 일반적으로 원형 서까래에 방형 부연을 얹는데 비해 양진당은 서까래를 네모지게 다듬어 부연과 같은 모습을 취하게 했다. 이 건물은 소위 고상식 주거에 속하는 것으로 건물 바닥을 지면에서 1미터 이상 높게 마련하면서 고상식 주거에서는 보기 드문 구들을 설치한 점에서 조선시대 주거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다. 방이 두 줄로 나열되는 겹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도 특색이다.
- 워크뷰의 맛있는 도보여행 https://www.walkview.co.kr/4400 ->상세 사진
- 풍양조씨참판공파 http://www.choslink.com/familystory/ourbusiness/yangjindang -> 현재는 풍양조씨 연수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여름에만 운영된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