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쾌재정
상주 쾌재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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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상주 쾌재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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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尙州 快哉亭 |
주소 |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230-1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1호 |
지정(등록)일 | 2011년 1월 3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상주 쾌재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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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쾌재정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문장가,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인천군에 임명되었던 난재 채수(1449~1515)가 중종반정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로 이사해 지은 정자이다. 이세택, 이천섭, 조석철, 류재규, 정종로, 김한동 등 당대 문인들이 이곳에서 도의를 토론하고 학문을 닦았다. 건물은 이안천과 주변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을 후손인 채헌이 새로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이 3칸, 옆면이 2칸이고, 실내 전체에 마루를 깔고 나무로 짠 창과 문을 달았다. 활처럼 크게 휜 지붕처마를 하였으며 둥근 기둥 위에 처마 무게를 받치는 대들보와 처마도리의 짜임새는 이익공이다. 기둥 사이에는 활짝 핀 꽃을 판자에 새긴 화반, 대들보와 종보와 함께 도리가 5줄로 짜인 오량가 형식 등이 돋보인다. 한편 쾌재정은 최초의 한글소설인 『설공찬전』이 지어진 역사적 장소이면서 18세기 누각과 정자의 건축 구성과 특성이 잘 드러난 중요한 자료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정자는 조선 전기의 문신 채수(1449-1515)가 1506년 낙향한 후 독서와 수양을 위해 지은 것이다.
채수는 1506년 중종이 왕위에 오를 때 공을 세웠지만, 이후 관직을 버리고 처가가 있던 상주로 내려와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이곳에서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인 『설공찬전』을 지었다.
안에는 공간 전체에 마루를 깔고 사방을 나무문으로 둘렀으며, 지붕 처마가 활처럼 크게 휘어져 있다.
현재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없어진 것을 18세기에 후손 채헌(1715-1795)이 다시 지은 것이다.
- ‘쾌재’란 ‘서늘한 바람을 쏘인다’는 의미이다. 초나라 양왕이 궁궐에서 노닐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열어젖히며 “쾌재라, 바람이여” 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 『설공찬전』은 저승을 다녀온 주인공 설공찬이 당시 인물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유교 사상이 아닌 귀신, 윤회 사상 등을 다루고 있었다는 점과 정치적 대립이 심했던 당시의 상황이 맞물리면서 금서가 되어 한문본은 모두 불타 사라졌으나 국문본이 남아 민간에 전해졌다. 채수 역시 이 일로 많은 탄핵을 받았으나 파직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 설공찬전(薛公瓚傳)은「금오신화」(1465∼1470)와 『기재기이(企齋記異)』(1553) 사이의 공백을 메꾸어 주는 작품이자, 그 국문본은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최초의 국문번역소설)로 평가된다.
참고 자료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이 탄생한, 상주 쾌재정, 선비 문화의 산실, 누정, 지역N문화 https://ncms.nculture.org/pavilion/story/2292 -> 채수는 낙향하여 쾌재정을 짓고 『설공찬전』을 저술하였다. 설공찬전은 당시 훈구대신과 신진사류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저승을 다녀온 주인공 설공찬이 당시의 정치적 인물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하지만 『설공찬전』은 귀신과 화복(禍福)의 윤회(輪廻)를 다루어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때문에 금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