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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선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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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선생 생가
Birthplace of Kim Seong-su
인촌 선생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인촌선생 생가
영문명칭 Birthplace of Kim Seong-su
한자 仁村先生 生家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473번지
지정(등록) 종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
지정(등록)일 1977년 12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탄생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인촌선생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인촌 선생 생가’는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1861년부터 한 채씩 지었다. 인촌은 원래 이들이 태어난 마을 이름인데, 김성수가 호로 사용하였다. 1891년 작은집 안채에서 태어난 김성수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정치·언론·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또 동아일보사, 고려대학교, 경성방직(주), 삼양사(주) 등을 경영하였다.

일제 강점 초기에 김성수는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하게 지내면서 자치 운동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 말기에 일제의 침략 정책에 협력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알려졌다.

인촌 생가는 긴 직사각형의 대지 위에다 낮은 담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큰집, 남쪽에는 작은집을 배치하였다. 한 대지에서 독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이하다. 생가 규모도 커서 조선 후기 전라도 지방 토호의 부유한 거주 환경 및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영문

Birthplace of Kim Seong-su

영문 해설 내용

대한민국 제 2대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1891-1955)와 그의 동생 김연수(1896-1979)가 태어난 집이다.

1861년부터 시작해 40여 년에 걸쳐 지었다고 하며, 지금의 집은 김연수가 1977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보수하고 복원한 것이다.

이 집은 여러 동의 건물이 있는 큰 규모로, 하나의 대지 위에 낮은 담을 두어 경계를 두고 북쪽에 큰집, 남쪽에 작은집을 배치하였다.

큰집에는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 안행랑채, 바깥행랑채, 안문간채, 바깥문간채 등이 있다. 작은집은 큰집에 비해 곳간채만 없을 뿐 집의 규모나 격식에 큰 차이가 없다. 김성수가 태어난 곳은 작은집의 안채이다.

김성수는 동생 김연수와 함께 동아일보사, 고려대학교, 경성방직(주), 삼양사(주) 등을 경영하였으며, 정치·언론·교육·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이 집은 한 대지에 두 집이 독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점이 특이하며, 조선 후기 전라도 지방 토호의 부유한 거주 환경 및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참고 자료

-> 사이트에 ‘친일 행적’에 대한 반론(?)이 있기 때문에 기존 국문에서 언급한 해당 내용 반영 보류함.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http://gocha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gochang&dataType=01&contents_id=GC02801496 -> 집 구조 설명 (인촌 선생 생가의 가장 안쪽에 있는 큰집 안채는 남부 지방의 일반적인 민가처럼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실이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 마당을 사이에 두고 억새로 지붕을 올린 곳간채가 있다. 사랑채는 안채 동쪽에 문간채들과 함께 별도의 일곽을 이루며, 왼쪽부터 큰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되었고 앞면과 측면에 툇마루를 두었다. 방 뒤쪽에 골방이나 도장방을 만들어 수장 공간을 확보한 것은 이 집 건물들의 공통점이다. 작은집은 큰집에 비해 곳간 1채가 적을 뿐 건물 자체의 규모나 치장에 사용된 부재 등은 거의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