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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곽씨 십이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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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은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9월 9일 (수) 11: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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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곽씨 십이정려각
Twelve Commemorative Plaques of the Hyeonpung Gwak Clan
현풍곽씨 십이정려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현풍곽씨 십이정려각
영문명칭 Twelve Commemorative Plaques of the Hyeonpung Gwak Clan
한자 玄風郭氏 十二旌閭閣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 1348-2
지정(등록) 종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
지정(등록)일 1995년 5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818㎡
웹사이트 현풍곽씨 십이정려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정려각이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기념하고 표창하기 위해 건립한 상징적인 건물로 내부에 정려비나 현판처럼 만든 정려기를 모신다.

이 건물은 선조 31년(1598)부터 영조 때까지 솔례마을의 현풍곽씨 한 문중에 포상된 12정려를 한 곳에 모은 정려각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가족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존재 곽준(存齋 郭䞭)과 그의 두 아들과 딸이 정려된 것과 임진왜란 때 비슬산 자락의 사효자굴에서 병든 부친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곽재훈의 네 아들인 결·청·형·호(潔·淸·泂·浩)가 효자사공(孝子四公)으로 정려된 것을 비롯하여 정려가 내릴 때마다 따로 정려각을 세우던 것을 영조 1년(1725) 이후 이들 정려를 현재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고 한다.

6·25 때 건물 일부가 포격으로 무너지고 비석 1기가 부서졌으나, 1963년에 모두 보수하였다. 그 후 2008년에 도로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한 문중에 12정려가 내려진 일은 매우 드물고도 자랑할 만한 것이다.

영문

Twelve Commemorative Plaques of the Hyeonpung Gwak Clan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commemorative plaques or steles were bestowed by the government to honor a person's patriotic loyalty, filial devotion, or matrimonial devotion. They were meant to be hung on red gates or in pavilions in front of the honored family's home. This pavilion houses a plaque and stele to commemorate the matrimonial devotion of several people from the Hyeonpung Gwak Clan.

From 1725, the family began collecting such plaques starting from the first one bestowed in 1598, and the collection was completed in 1804 as it is now. Total 15 people were bestowed steles and plaques, including the four sons of Gwak Jae-hun who died while protecting their father in a battle of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the family of Gwak Jun (1551-1597) who died in a battle against the Japanese, and some of the widows who committed suicide to protect their chastity.

From right, 10 rooms of the pavilion house wooden plaques, and 2 in the left house steles.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the pavilion was partially destroyed and a stele broken, but those were restored in 1963.

영문 해설 내용

정려각이란 조선 시대(1392-1910)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 표창하기 위해 건립한 상징적인 건물로, 내부에 정려비나 현판처럼 만든 정려를 모신다. 이 정려각은 현풍곽씨 가문의 사람들이 하사받은 정려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1598년에 처음 하사받은 정려를 시작으로 각각 건립 연대가 다른 여러 개의 정려들을 1725년부터 현재 자리에 모으기 시작해 1804년 지금의 규모가 완성되었다. 정유재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한 곽준(1551-1597) 일가, 임진왜란 때 아버지 곽재훈을 지키다가 왜적에게 죽임을 당한 네 형제, 남편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한 부인들까지 총 15명이 정려와 정려비를 받았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정려각의 오른쪽 끝에서부터 10칸은 정려각이고 나머지 왼쪽 2칸은 비각이다. 한국전쟁(1950-1953) 때 건물 일부가 포격으로 무너지고 비석 1기가 부서졌으나 1963년에 보수하였다.

  • 12개의 정려+2개의 비석=15명인 이유는? 그리고 영문 제목은 12이니 헷갈리지 않을까요? 정려비, 정려, 인물의 개수가 여러 번 등장하니 불필요한 듯... 생략했습니다.
  • 2008년에 도로변에 있다가 옮겨진 대상이 뭔가요? 비석 하나? 아니면 정려각 전체? 생략했음.

초안

이 정려각은 현풍 곽씨 가문의 사람들이 하사받은 정려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1598년 하사받은 정려를 시작으로 각각 건립 연대가 다른 여러 개의 정려들을 1725년부터 현재 자리에 모으기 시작해 1804년 지금의 규모가 되었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오른쪽 10칸은 정려각이고, 나머지 2칸은 비각이며, 안에는 12개의 정려와 2기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정려들은 정유재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한 곽준 일가, 임진왜란 때 아버지 곽재훈을 지키다가 왜적에게 죽임을 당한 네 형제, 남편을 위해 목숨을 버린 부인들까지 총 15명에게 내려졌다.

6·25 때 건물 일부가 포격으로 무너지고 비석 1기가 부서졌으나, 1963년에 모두 보수하였다. 그 후 2008년에 도로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참고자료

  • '현풍곽씨 12정려각' 대구사람도 잘 모르는 대구의 전통문화유산, 영남일보, 2020.1.8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00107010001110 -> 현풍곽씨12정려각은 조선중기 이후 조정에서 솔례마을 곽씨문중 인물들에게 내린 정려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것으로 충신, 효자, 열부만 모두 15명에 달한다. / 본래 이 정려각들은 솔례마을 입구에 흩어져 있었는데 1725년부터 한 자리에 모으기 시작해 1804년 비로소 12칸 정려각이 됐다. 이후 몇 번의 중수와 이건을 거쳐 1964년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췄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오른쪽 10칸은 정려각이고, 나머지 2칸은 비각이다.
  • (낙동강 물레길) ⑫'삼강의 문중' 현풍 곽씨 12정려각, 매일신문, 2012.3.14. http://news.imaeil.com/Society/2012031407081153848 -> 각각 건립 연대는 다르지만 조선 영조 때 한곳에 모아 세웠다. 임진왜란 때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한 곽준 일가(두 아들, 사위와 딸, 며느리), 곽재훈의 사효자(곽결'청'형'호)와 열부 전의 이씨, 광주 이씨, 밀양 박씨 등이 각각 정려돼 현판이 봉안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