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태고정
달성 태고정 Taegojeong House, Dals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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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달성 태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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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Taegojeong House, Dalseong |
한자 | 達城 太古亭 |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653 |
지정(등록) 종목 | 보물 제554호 |
지정(등록)일 | 1971년 12월 6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달성 태고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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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이 정자는 성종 10년(1479)에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손자 박일산(朴壹珊)이 건립한 것이다. 원래는 종가 안에 붙어있던 별당 건물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인 선조 25년(1592)에 불타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이를 광해군 6년(1614)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현재 대청에는 윤두수(尹斗壽)의 한시(漢詩)를 새긴 현판과 함께 정유재란 뒤에 이곳에 온 명나라 선무관이 남긴 현판 등이 걸려 있다.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一’자형 건물로, 각각 2칸씩 대청마루와 방을 꾸몄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정자건물에서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둔 것은 흔치 않은 것이다.
태고정은 그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며, 조선 전기 건축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인 가치가 크다.
영문
Taegojeong House, Dalseong
영문 해설 내용
이 정자는 1479년에 박일산(1456-?)이 세운 것이다.
박일산은 박팽년(1417-1456)의 손자이다. 박팽년은 1455년 삼촌에 의해 폐위되고 유배당한 단종에게 충절을 지킨 신하였다. 박팽년과 몇몇 신하들은 새로 왕위에 오른 세조(r. 1455-1568)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들의 모의는 발각되었고, 세조는 이들을 모질게 고문한 뒤 처형했다. 이후 박팽년의 후손들은 이곳 묘골 마을에 세거하면서 순천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마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이 정자는 원래 순천박씨 종가의 별당으로 쓰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후손 박종남이 161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건물의 구조는 ‘一’자형 평면으로, 앞에 난간을 두른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있다. 대청과 온돌방 쪽의 지붕을 서로 다르게 처리해 외관이 독특하다. 서쪽에 부엌이 있는데, 정자 건물에서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둔 것은 흔치 않다.
초안
이 정자는 1479년 박일산(1456-?)이 세운 것이다.
박일산은 박팽년(1417-1456)의 손자이며, 묘동에 집성촌을 이룬 순천 박씨의 파조이다.
박팽년은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반대한 이들과 함께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모의는 발각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처형당했다.
마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이 건물은 원래 종가의 별당으로 쓰였으나, 임진왜란 때 종가가 불에 타면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후손 박종남이 1614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은 것이다.
건물은 ‘一’자형 평면에 앞에 난간을 두른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있는 구조이다. 정자임에도 아궁이가 아닌 별도의 부엌을 두고 있는 드문 예로, 부엌은 서쪽 끝 칸 뒤쪽에 있다. 대청과 온돌방 쪽의 지붕을 서로 다르게 처리해 외관이 독특한 이 건물은 현재 육신사 경내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 달성군 묘골 마을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반대한 이들과 함께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모의는 발각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처형당했다. (성삼문 참고)
참고자료
- 태고정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01 ->박팽년 둘째 며느리의 친정아버지가 달성 현감으로 있을 때 사육신이 처형되었고, 그녀는 달성 인근 지역의 관노가 되었다가 아들을 낳게 되자 친정집 여종의 딸과 바꾸어 아들을 살려냈다. ‘박비’라는 이름으로 살던 박일산의 사연은 이모부인 이극균(1437-1504)을 통해 성종에게 전해졌고, 성종이 ‘일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노비의 신분을 풀어주었다. 박일산은 후손이 없었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묘골에 정착하고 순천 박씨의 파조가 되었다. (https://blog.naver.com/kwongunho/30183303741)
- 옛문화답사회,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rkdc&logNo=22000559281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일시루(一是樓)라고도 불리우는 이 건물은, 군더더기가 없고 반듯하면서도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일시루는, 항상 바르고 올곧게 살고자 하는 뜻이 담긴 글이다. 이 편액은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글인데, 조선 전기 3대 명필의 하나였던 그의 송설체(松雪體)가 돋보이는 글씨이다. 태고정 편액은 양녕대군이 썼다는 주장과 한석봉의 글씨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 태고정(太古亭), 사육신 박팽년의 숨결이 들리는 달성 하빈, 시니어매일, 2020.7.1.기사 http://www.senior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79 -> 현재 위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기도 했던 사당은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름도 육신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육신뿐만 아니라 박팽년의 부친 중림의 위패도 봉안하고 있는 관계로 사당에는 ‘숭정사(崇正祠)’ 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태고정(太古亭)은 이 육신사 경내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 특히 지붕의 처리에서 특색이 드러난다. 대청이 있는 오른쪽은 팔작지붕, 방과 부엌이 있는 왼족은 맞배지붕인데, 여기에 부섭지붕을 달아내어 마감하였다. 그에 맞추어 팔작지붕 부분은 겹처마, 부섭지붕쪽은 홑처마를 둘렀다.
- 지역N문화, 선비문화의 산실, 누정 https://ncms.nculture.org/pavilion/story/2391 -> 대청마루에는 여러개의 시판들이 걸려 있는데, 모두다 절의와 관련된 내용이다. 임진왜란 때 태고정이 있는 마을이 왜적에 의해 초토화되었는데, 유일하게 박팽년의 사당만이 남았다고 한다. 당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1533~1601)가 치찰사로서 이곳을 방문하여 시를 한 수 남겼다고 하는데, 그 시가 편액으로 태고정에 게시되어 있다. 또한 임란 직후인 1598년(선조 31)에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1553~1634)이 태고정을 명나라 사신과 방문하여 그들에게 직접 써서 전한 시가 편액으로 걸려 있으며, 그의 문집 『오봉집(五峰集)』에 전한다.
- 송풍수월 (松風水月),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ohyh45/20167775021 -> 태고정 평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