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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월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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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연정
월연정, 밀양 문화관광, 밀양시 홈페이지.
대표명칭 월연정
한자 月淵亭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용평로 330-7 (용평동, 월연정)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3호
지정(등록)일 1985년 1월 14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3동
웹사이트 월연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 중종 때 한림(翰林)*을 지낸 월연 이태(月淵 李迨, 1483~1536)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기 직전에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와 1520년에 지은 쌍경당(雙鏡堂), 월연대(月淵臺), 제헌(霽軒) 등을 모두 합쳐 월연정이라 부른다.

쌍경당과 월연대는 추화산 동쪽 기슭, 밀양강과 단장천이 만나는 절벽 위에 들어선 정자를 겸한 별장이다. 달이 하늘과 강물에 떠있어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지던 곳으로 ‘쌍경(雙鏡)’은 ‘강물과 달이 맑기가 거울 같다’, ‘월연(月淵)’은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쌍경당은 주변 경관을 잘 볼 수 있게 방과 대청을 개방형으로 꾸미고, 사계절 모두 생활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두었다. 월연대는 정자 기능이 두드러지도록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방을 대청으로 둘렀다. 제헌은 이태의 맏아들을 추모하는 건물로 1956년 건립되었다.

쌍경당과 월연대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에 의해 1757년 쌍경당이 복원되었고 1866년 월연대가 복원되었다.

쌍경당, 월연대, 제헌은 각기 다른 지형에 다른 형태로 들어섰지만 모두 풍경이 뛰어난 자연 지형을 이용하면서 환경을 최대한 살리려 했던 조선 사대부의 자연관과 전통 조경 양식을 잘 보여 준다.


  • 한림(翰林): 조선시대에 예문관에서 사기(史記)의 초고를 쓰는 일을 맡아보던 정9품 벼슬. 예문관 검열이라고도 한다.
  • 기묘사화(己卯士禍): 조선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사화.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 김정 등의 신진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 전기의 문신 이태(1483-1536, 호 월연)의 별장이다.

이태는 1519년의 사화를 피해 낙향해 이곳에 자리를 잡고, 1520년에 월영사가 있던 자리에 대청인 쌍경당과 정자 월영대를 지었다고 한다.

두 건물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후손들에 의해 1757년에 쌍경당이, 1866년에 월연대가 복원되었다.

제헌은 월연대 복원 당시 함께 지어진 것으로, 이태의 맏아들인 이원량(1504-1567)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월연대가, 왼쪽에 쌍경당이 있다. 계곡 사이에 다리를 놓아 두 영역이 연결되도록 하였다.

월연대는 중앙에 온돌방을 두고 사방을 대청으로 두른 정자이며, 쌍경당은 왼쪽 대청과 오른쪽 온돌방이 있는 기본 구조의 후면에 아궁이를 더하여 거주의 편의를 높였다.

월연대는 가장 높은 언덕에 남향으로, 쌍경당은 중간 높이 지대에 동향으로, 제헌은 가장 낮은 곳에 남동향으로 위치하고 있어, 지형에 따라 방향을 달리한 건물들이 하나의 권역을 이루고 있으며, 어느 곳에서나 밀양강을 조망할 수 있다.

이 일대는 2012년에 명승(밀양 월연대 일원, 명승 제87호)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 제헌 / 재헌 - 명칭 확인 필요 (기존 국문 제헌 / 문화재청 재헌)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