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금남 남산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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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1906년에 세운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남이웅은 선조(1567∼1608 재위), 광해군(1608~1623 재위), 인조(1623~1649 재위) 때 정치가로 평소 법을 잘 지키고 검소하였다. 1613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지냈다. 병자호란(1636. 12~1637. 1)이 끝나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함께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남산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며, 앞에는 삼문과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영당 안에는 남이웅의 영정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사당 뒤쪽에는 남이웅의 무덤과 1658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

1차 수정

1906년에 세운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남이웅은 선조(1567~1608 재위), 광해군(1608~1623 재위), 인조(1623~1649 재위) 때 정치가로 평소 법을 잘 지키고 검소하였다. 1613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지냈다. 1637년 1월 병자호란이 끝나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함께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남산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며, 앞에는 삼문과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영당 안에는 남이웅의 영정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사당 뒤쪽에는 남이웅의 무덤과 1658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1906년(광무 10) 유림들이 세운 남이웅(南以雄, 1575~1648, 본관 ; 의령)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 남이웅은 조선 선조(1567~1608), 광해군(1608~1623), 인조(1623~1649) 대 활동하였던 정치가로 평소 법을 잘 지키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다. 1613년(광해군 5) 문과 급제 후 예조좌랑과 병조좌랑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나고(1637년 1월)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인질로 심양에 끌려갈 때 함께 갔다가 돌아온 뒤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638년(인조 16) 대사헌에 올라 엄정한 법 집행으로 미신을 없애고자 노력하였다.
    •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건물이며, 앞에는 삼문과 담장이 있다. 사당 안에는 남이웅선생의 영정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사당 뒤쪽에는 묘소와 1658년(효종 9)에 세운 묘비가 있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금남 남산영당 (錦南 南山影堂) → 남산영당 (南山影堂)
      • 수정이유: 남산영당이라는 명칭 앞에 ‘금남’을 붙여야 할 이유가 확인되지 않음.
    • 여러 벼슬을 지냈다. → 좌의정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 수정이유: 정승까지 지낸 이를 단순히 ‘정치가’ ‘여러 벼슬을 지냈다.’라고만 서술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음.
    •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함께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갈 때 선생으로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 수정이유: 사당의 주인공인 남이웅보다 소현세자에 더 중점이 두어지는 것은 적절치 않으므로 우빈객의 역할을 밝혀주는 것이 좋겠음.
    • 앞에는 삼문과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 삼문과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 수정이유: 글귀 그대로라면 담장도 앞에만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삼문이 앞에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따로 서술한다면 오히려 독자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음.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1906년에 세운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06년에 세운 남이웅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06년에 세운 것이다.)

2차 수정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06년에 세운 것이다.

남이웅은 선조(1567~1608 재위), 광해군(1608~1623 재위), 인조(1623~1649 재위) 때 정치가로 평소 법을 잘 지키고 검소하였다. 1613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1647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1637년 1월 병자호란이 끝나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갈 때 선생으로 함께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남산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며, 삼문과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영당 안에는 남이웅의 영정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사당 뒤쪽에는 남이웅의 무덤과 1658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