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장군 덕천군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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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덕천군(德泉君, 1397∼1465)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덕천군은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후생(李厚生)이다.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공을 낳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처음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있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때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1차 수정

조선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1397~1465)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덕천군은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낳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원래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때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조선 제2대 임금 정종(1398~1400)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1397~1465)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 덕천군은 어머니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낳았으며,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아버지 정종이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가난한 백성의 구호를 위해 힘썼으며, 왕자의 신분에도 직접 농사를 지었다. 여름 홍수로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적극 구제하는 등 덕을 쌓은 어른이라는 의미의 ‘적덕공’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 사우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앞에는 참배 공간을 뒤에는 제사 공간을 두었다. 처음에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1739년(영조 15)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때 덕천군의 후손 이건창(李建昌, 1852~1898, 본관 ; 전주)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장군 덕천군사우 (將軍 德泉君祠宇) → 덕천군사우 (德泉君祠宇)
      • 수정이유: 세종시의 시각에서는 장군이라는 소재지 지명이 필요할 수도 있겠으나, 전국적인 관점에서 그 지명을 밝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정식 명칭을 이름으로 써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함.
    •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 효심이 깊고 우애로웠다.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 삭제)
      • 수정이유: 상식적으로 본다면 이름을 지을 당시 이미 효심이 깊고 우애로움이 확인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음. 사실을 확인한 문안을 다시 작성할 필요 있음.
    •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 뒤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칸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또는 이 구절 삭제)
      • 수정이유: 뒤칸, 앞칸은 하나의 단어이므로 붙여 쓰거나, 뒤에 제단을 두고 앞에 참배 공간을 둔다는 당연한 사실을 따로 밝힐 필요가 있을지 의심스러움.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덕천군은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낳았다고 한다.(덕천군은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낳았다고 한다. ->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덕천군을 낳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2차 수정

조선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1397~1465)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덕천군을 낳았다고 하며, 효심이 깊고 우애로웠다. 가난한 백성의 구호를 위해 힘썼으며, 왕자의 신분에도 직접 농사를 지었다. 여름 홍수로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적극 구제하는 등 ‘덕을 쌓은 어른’이라는 의미의 ‘적덕공(積德公)’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뒤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원래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때 덕천군의 후손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