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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곽씨 십이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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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곽씨 십이정려각
현풍곽씨 십이정려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현풍곽씨 십이정려각
한자 玄風郭氏 十二旌閭閣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 1348-2
지정(등록) 종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
지정(등록)일 1995년 5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818㎡
웹사이트 현풍곽씨 십이정려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정려각이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기념하고 표창하기 위해 건립한 상징적인 건물로 내부에 정려비나 현판처럼 만든 정려기를 모신다.

이 건물은 선조 31년(1598)부터 영조 때까지 솔례마을의 현풍곽씨 한 문중에 포상된 12정려를 한 곳에 모은 정려각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가족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존재 곽준(存齋 郭䞭)과 그의 두 아들과 딸이 정려된 것과 임진왜란 때 비슬산 자락의 사효자굴에서 병든 부친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곽재훈의 네 아들인 결·청·형·호(潔·淸·泂·浩)가 효자사공(孝子四公)으로 정려된 것을 비롯하여 정려가 내릴 때마다 따로 정려각을 세우던 것을 영조 1년(1725) 이후 이들 정려를 현재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고 한다.

6·25 때 건물 일부가 포격으로 무너지고 비석 1기가 부서졌으나, 1963년에 모두 보수하였다. 그 후 2008년에 도로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한 문중에 12정려가 내려진 일은 매우 드물고도 자랑할 만한 것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정려각은 현풍 곽씨 가문의 사람들이 하사받은 정려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보호했다.

1598년 하사받은 정려를 시작으로 각각 건립 연대가 다른 여러 개의 정려들을 1725년부터 현재 자리에 모으기 시작해 1804년 지금의 규모가 되었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오른쪽 10칸은 정려각이고, 나머지 2칸은 비각이며, 안에는 12개의 정려와 2기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정려들은 정유재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한 곽준 일가, 임진왜란 때 아버지 곽재훈을 지키다가 왜적에게 죽임을 당한 네 형제, 남편을 위해 목숨을 버린 부인들까지 총 15명에게 내려졌다.

6·25 때 건물 일부가 포격으로 무너지고 비석 1기가 부서졌으나, 1963년에 모두 보수하였다. 그 후 2008년에 도로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 '현풍곽씨 12정려각' 대구사람도 잘 모르는 대구의 전통문화유산, 영남일보, 2020.1.8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00107010001110 -> 현풍곽씨12정려각은 조선중기 이후 조정에서 솔례마을 곽씨문중 인물들에게 내린 정려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것으로 충신, 효자, 열부만 모두 15명에 달한다. / 본래 이 정려각들은 솔례마을 입구에 흩어져 있었는데 1725년부터 한 자리에 모으기 시작해 1804년 비로소 12칸 정려각이 됐다. 이후 몇 번의 중수와 이건을 거쳐 1964년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췄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오른쪽 10칸은 정려각이고, 나머지 2칸은 비각이다.
  • (낙동강 물레길) ⑫'삼강의 문중' 현풍 곽씨 12정려각, 매일신문, 2012.3.14. http://news.imaeil.com/Society/2012031407081153848 -> 각각 건립 연대는 다르지만 조선 영조 때 한곳에 모아 세웠다. 임진왜란 때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한 곽준 일가(두 아들, 사위와 딸, 며느리), 곽재훈의 사효자(곽결'청'형'호)와 열부 전의 이씨, 광주 이씨, 밀양 박씨 등이 각각 정려돼 현판이 봉안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