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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성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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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7월 23일 (목) 01: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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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성주사
대표명칭 창원 성주사
한자 昌原 聖住寺



해설문

국문

성주사는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 801~888)이 흥덕왕 10년(835)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826~836 재위) 때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여 왕이 늘 근심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지리산에 있는 무염과 의논하라 하였다. 왕이 곧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전하자 무염이 신통력으로 왜구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기뻐하며 밭과 노비를 내리고 절을 창건하도록 하여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성주사는 ‘성인이 머무는 절’이라는 뜻이고, 성인은 무염을 일컫는다.

성주사는 ‘웅신사(熊神寺)’ 또는 ‘곰절’로도 불리는데, 이는 임진왜란으로 절이 모두 소실된 후 다시 절을 짓기 위해 옛 절터에 쌓아둔 목재를 밤사이 곰들이 지금의 절 자리로 옮겨놓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전란으로 소실되었던 성주사는 선조 37년(1604)에 중건되었고, 숙종 7년(1681)에 한 차례 더 중수되었다.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규모 불사(佛事)가 이루어지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경내의 주요 전각으로는 대웅전, 관음전, 지장전, 영산전, 삼성각 등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목조 석가여래 삼불 좌상(보물 제1729호)과 감로왕도(보물 제1732호)를 비롯하여 여러 문화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성주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朗慧和尙 無染, 801~888)이 835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826~836 재위) 때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여 왕이 늘 근심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지리산에 있는 무염과 의논하라 하였다. 왕이 곧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전하자 무염이 신통력으로 왜구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기뻐하며 밭과 노비를 내리고 절을 창건하도록 하여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성주사는 ‘성인이 머무는 절’이라는 뜻이고, 성인은 무염을 일컫는다.

성주사는 ‘웅신사(熊神寺)’ 또는 ‘곰절’로도 불린다. 임진왜란으로 절이 모두 소실된 후 절을 다시 짓기 위해 옛 절터에 목재를 쌓아두었는데 밤사이 곰들이 지금의 절 자리로 목재를 옮겨놓았다고 한다.

전란으로 소실되었던 성주사는 1604년에 중건되었고, 1681년에 한 차례 더 중수되었다.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규모 불사가 이루어지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경내의 주요 전각으로는 대웅전, 관음전, 지장전, 영산전, 삼성각 등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제1729호)과 감로왕도(제1732호)를 비롯하여 여러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