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포석정지
경주 포석정지 Poseokjeong Pavilion Site, G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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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주 포석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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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Poseokjeong Pavilion Site, Gyeongju |
한자 | 慶州 鮑石亭址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454-1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1호 |
지정(등록)일 | 1963년 1월 2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역사사건/역사사건 |
시대 | 통일신라 |
수량/면적 | 5,234㎡ |
웹사이트 | 경주 포석정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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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는 유배거(流杯渠)* 유적으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연회장소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해내는 돌거북이 있고, 이 물이 돌로 만든 구불구불한 물길을 따라 흘러 되돌아오는 구조이다. 물이 흐를 때 주 흐름에 반해서 생기는 회돌이 현상(渦流)을 이용한 것이다. 지금은 일제 강점기에 물길을 임의로 보수하면서 원형이 많이 파손된 상태이고, 배수구의 마무리도 분명하지 않다. 물길의 깊이는 20cm 정도, 전체 길이는 22m에 이르고, 물길의 상하 높이 차이는 5.9cm 정도이다.
1999년 주변 일부를 발굴조사할 때 ‘포석(砲石)’이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포석사(鮑石祠)라는 기록과 발굴조사에서 이곳에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고,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정원이 아니라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기록에는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이 이곳에 와서 남산신(南山神)의 춤을 보고 따라 추었다고 하며, 927년 겨울, 후백제왕 견훤(甄萱)에 의해 경애왕(재위 924~927)이 자결을 강요당했던 장소로 언급되어 있다.
- 유배거(流杯渠) : 잔을 물에 띄워 흐르게 한 도랑.
-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워 놓고 그 술잔이 자기 앞에 오면 시를 읊으며 놀던 놀이.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인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영문
Poseokjeong Pavilion Site, Gyeongju
This is the former site of Poseokjeong Pavilion, which was a place used by the royal family of the Silla kingdom (57 BCE-935 CE) for recreation and/or ritual purposes. It is located at the foot of the western slope of Namsan Mountain, which was the southern boundary of the ancient Silla capital.
Nothing remained of this site apart from the vestiges of a winding, man-made water channel.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Japanese authorities renovated the remains of the water channel arbitrarily without consideration of archeological evidence, and so its exact original appearance is now unknown. The current water channel measures 20 cm in depth and 22 m in length.
These kinds of winding water channels were historically used by literati for poetry writing competitions among friends, which is an activity dating to at least the mid-4th century in China. During the competition, guests would sit along a winding water channel, and a liquor glass would be placed to float on the water. Each guest would have to compose a poem before the glass reached them, or they would be forced to drink three glasses of liquor as punishment.
A place named Poseokjeong appears in historical records such as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amguk sagi) and the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Samguk yusa). It is said that King Heongang (r. 875-886) saw the guardian spirit of Namsan Mountain dance here and copied the spirit by following along, and that in 927, King Gyeongae (r. 924-927) was killed by an enemy during a banquet held here.
In 1999, the area nearby the water channel was excavated. At this time, roof tiles with the inscription "Poseok" were discovered, confirming that this was indeed the place mentioned in the historical records. Various rituals tools were also uncovered.
Because of the water channel and aforementioned records, this place was long been thought to be a recreation or leisure pavilion. However, other historical records along with the artifacts excavated in the vicinity suggest this place may have also functioned as shrine where rituals were performed, possibly to the spirit of the mountain.
Up until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re was also a stone tortoise which funneled water from the mountain into the mouth of the man-made water channel, but this stone went missing/was taken/no longer remains.
- http://blog.daum.net/taegeukh/6733670
-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29&num=9804
- 이궁이었다는 설도 있는데요... 남쪽에 있는 왕궁...
영문 해설 내용
남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이 유적은 신라시대의 연회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헌강왕(재위 875-886) 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 있던 정자는 없어지고 물길을 만드는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중국 동진 시대의 관리이자 서예가였던 왕희지(303-361)는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워 놓고 놀며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즐겼다고 한다. 술잔이 자기 앞으로 오는 동안 시를 지어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셔야 했다. 이 유적 역시 이와 같은 놀이를 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구불구불한 물길로 연결하는 돌거북이 있었다고 하나, 일제강점기에 원형이 많이 훼손되면서 돌거북은 사라지고 물길 역시 임의로 보수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물길의 깊이는 20cm 정도, 전체 길이는 22m에 이른다.
1999년 이 주변을 발굴하던 중, ‘포석(砲石)’이라 새겨진 기와와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에 따라 이곳이 포석사라는 사당과 관련이 있으며, 통일신라 후기에 제사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