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운악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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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29일 (월) 17:16 판 (새 문서: =='''2020 국문'''== ===초고=== 운악산성은 포천시 화현면과 가평군 상면에 걸쳐 있는 산성이다. 조선후기 포천현의 사찬 읍지인 『견성지(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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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문

초고

운악산성은 포천시 화현면과 가평군 상면에 걸쳐 있는 산성이다. 조선후기 포천현의 사찬 읍지인 『견성지(堅城誌)』에는 “운악산성은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가평 현등산의 서악이다. 봉우리 꼭대기에 옛 대궐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산성의 입지 조건과 쌓은 방식 그리고 수습 유물을 통해서 볼 때, 운악산성은 고려시대에 거란이나 몽고 혹은 왜구 등의 외적을 막기 위해 급히 쌓은 산성으로 보인다. 험준한 산의 절벽을 많이 활용하여, 극히 적은 부분만 성벽을 축조하였다. 돌로 쌓은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무지치(무지개)폭포 동북쪽 능선에 일부분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수정

포천시와 가평군의 경계에 있는 운악산에 축조된 산성이다.

험준한 산의 절벽을 많이 활용하여 극히 적은 부분만 돌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지고, 무지치(무지개) 폭포 동북쪽 능선에 일부분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 포천 읍지에는 운악산 꼭대기에 옛 대궐 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은 험준하고 높은 입지를 선택하여 적은 노동력으로 한정된 구역에만 성을 쌓았으며, 축성 방법에 계획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성을 갖는 산성은 고려시대 이후 갑작스러운 외침에 대비하여 축조한 사례가 많다. 출토된 기와와 토기는 주로 고려~조선 시대에 사용된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운악산성은 고려 시대에 거란과 몽고·합단(哈丹)이 침입했을 때, 혹은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이 극심한 시기에 시급히 축조하여 사용되다가 곧 폐기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