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운담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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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문

초고

조선 후기의 학자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운담(雲潭)은 마을 이름이고, 영당(影堂)은 영정(초상화)을 봉안한 사당을 말한다. 김평묵은 스승 이항로를 이어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며 외세를 배척하는 민족운동을 이끌어낸 인물이다.

운담영당은 운담정사에서 출발하였다. 운담정사는 김평묵이 만년에 강학했던 곳으로, 김평묵이 68살에 연천에서 이곳 운담으로 이사 오면서 그의 제자들이 마련해 두었던 곳이다. 1891년 김평묵이 73살에 생을 마감한 뒤 1915년 제자들이 운담정사에 영당을 세웠다. 김평묵뿐만 아니라 그가 생전에 추앙했던 조선시대의 학자 송시열(1607~1689)과 이항로(1792~1868) 그리고 중국 송대의 주희(1130~1200)를 함께 배향하였다.

운담영당은 1950년 한국전쟁 때에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는데, 1999년 이곳 유림과 청풍김씨·순흥안씨 문중 그리고 포천시의 지원을 받아 복원하였다. 그때에 한국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고려시대의 학자 안향(1243~1306)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지역 유림의 행사로 제사 지낸다.

수정

조선 후기의 학자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운담은 마을 이름이고, 영당은 영정(초상화)을 봉안한 사당을 말한다. 김평묵은 스승 이항로(李恒老, 1792~1868)를 이어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며 외세를 배척하는 민족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운담영당은 김평묵이 말년에 학문을 가르치던 공간인 운담정사에서 출발하였다. 고종 28년(1891) 김평묵이 73살에 생을 마감한 뒤, 1915년 제자들이 운담정사에 영당을 세웠다. 김평묵 외에 그가 생전에 추앙했던 조선시대의 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이항로 그리고 중국 송대의 주희(朱熹, 1130~1200)를 함께 배향하였다.

운담영당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다가, 1999년 이곳 유림과 청풍김씨·순흥안씨 문중 그리고 포천시의 지원을 받아 복원하였다. 그때 한국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고려시대의 학자 안향(安珦, 1243~1306)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