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옥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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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문

초고

조선 중기의 학자 박순(1523~1589) 선생을 주향으로 모신 서원이다. 선생은 본관이 충주이며 서경덕의 문인으로 1572년부터 영의정에 14년간 재직했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서에 모두 뛰어났다. 포천의 산수를 사랑하여 노년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면서 여생을 마쳤고, 이 고장의 선비들이 선생의 높은 덕과 깊은 학문을 기리기 위해 1649년에 서원을 창건하고 제향하게 되었다. 1698년 영의정 신완(1646~1707)의 건의로 이의건(1533~1621), 김수항(1629~1689) 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에 대한 향사와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던 중 1713년에 사액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81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경내 건물로는 6칸의 숭현각, 신문, 동서 협문, 그리고 서원 앞에는 1909년에 건립된 박순의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1607~1689)이 지은 것이다.

수정

조선 중기의 학자 박순(朴淳, 1523~1589)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박순은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문인이다. 명종 8년(1553)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선조 5년(1572)에 영의정까지 올랐다. 포천의 산수를 사랑하여 노년에 이곳으로 낙향하고 제자를 기르면서 여생을 마쳤다.

이 고장의 선비들이 박순의 덕과 학문을 흠모해 효종 9년(1658)에 서원을 창건하였다. 숙종 24년(1698)에 이의건(李義健, 1533~1621),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을 추가 배향하고, 숙종 39년(1713)에 임금이 ‘옥병(玉屛)’이라고 새긴 액자를 내렸다. 흥선대원군(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된 뒤 위패는 정결한 땅에 묻고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왔다. 1926년에 김성대(金聲大, 1622~1695)·이화보(李和甫, 1714~1787)·윤봉양(尹鳳陽, 1695~1762)을 추가 배향하고, 1981년에 복원하였다.

경내 건물로는 6칸의 숭현각, 신문, 동서 협문이 있다. 서원 앞에는 1909년에 건립한 박순의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