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장암진성
서천장암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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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서천장암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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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舒川長巖鎭城 |
주소 |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1-11 |
지정(등록) 종목 | 충청남도 기념물 제97호 |
지정(등록)일 | 1995년 3월 6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시대 | 고려시대 |
수량/면적 | 74,198㎡ |
웹사이트 | 서천 장암진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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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 성곽은 해발 90.1m의 후망산 남서쪽 끝에 있으며 산성이라기 보다는 평지에 있는 평지성에 가깝다. 1511년 축성이 시작되었으나 바로 중지되었다가, 1514년에 완성되었다.
장암진(長巖鎭)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舒川浦營)” 또는 “서천포진(舒川浦鎭)”으로 불렸다.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며, 남쪽벽과 북쪽벽에 각각 1개씩의 문터가 있다. 동쪽벽 근처에는 깊이 1.2m 정도의 해자가 있으며, 서쪽벽은 일제시대 때 거의 헐려 형태가 잘 남아있지 않다.
이곳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고, 고려말에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이 왜적을 격파하는 등 역사적으로 뜻 깊은 곳이기도 하다.
1차 수정
장암진성은 해발 90.1m의 후망산 남서쪽 끝에 있는 평지성이다. 1511년 축성이 시작되었으나 바로 중지되었다가, 1514년에 완성되었다.
장암진(長巖鎭)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舒川浦營)” 또는 “서천포진(舒川浦鎭)”으로 불렸다.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다. 남쪽벽과 북쪽벽에 각각 1개씩의 문터가 있다. 동쪽벽 근처에는 깊이 1.2m 정도의 해자가 있으며, 서쪽벽은 일제강점기 때 거의 헐려 형태가 잘 남아있지 않다.
이곳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고, 고려 말에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이 왜적을 격파하는 등 역사적으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1
- 장암진(長巖鎭)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舒川浦營)” 또는 “서천포진(舒川浦鎭)”으로 불렸다. →장암진성(長巖鎭城)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성(舒川浦營城)” 또는 “서천포진성(舒川浦鎭城)”으로 불렸다.
- 성벽의 둘레는 660m인데,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다. 남쪽벽과 북쪽벽에 각각 1개씩의 문터가 있다. 동쪽벽 근처에는 너비 4m, 깊이 1.2m 정도의 해자가 있으며, 서쪽벽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헐려 형태가 잘 남아있지 않다.
- 이곳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고, → 이곳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으로도 전해지며,
- 분야별 자문위원2
- 돌로 쌓았는데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너비 190m, 남·북 너비 100m이다. 위에서 보았을 때 동쪽이 좁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의 문터가 있는데 북문터는 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반원형으로 내어 쌓은 옹성(甕城)문이다. 동남 모서리와 북동 모서리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치(雉)가 설치되어 있다. 동쪽 성벽 바깥 5~7m 떨어진 곳에는 너비 4m, 깊이 1.2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海子)가 확인되었다.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수정 의견 없음.
2차 수정
장암진성은 해발 90.1m의 후망산 남서쪽 끝에 있는 평지성이다. 1511년 축성이 시작되었으나 바로 중지되었다가, 1514년에 완성되었다.
이곳은 서해안으로 흐르는 금강 하구에 위치하며,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으로 전해진다. 고려 말에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이 왜적을 격파하는 등 역사적으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돌로 쌓은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너비 190m, 남북 너비 100m로, 위에서 보았을 때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다. 서쪽벽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헐려 형태가 잘 남아있지 않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의 문터가 있고, 동남 모서리와 북동 모서리에는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치(雉)가 설치되어 있다. 동쪽 성벽 바깥쪽으로 5~7m 떨어진 곳에는 너비 4m, 깊이 1.2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海子)가 확인되었다.
참고자료
- 『중종실록』 권14, 중종 6년 9월 4일; 동월 5일.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9, 충청도 서천군 관방조. → 실록 기사에는 충청도는 왜적이 침입하는 요해지가 아니기 때문에 축성을 정지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14년 성을 쌓기 시작하여 완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장암진으로 불리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서천장암진성(舒川長巖鎭城),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400970000#
- 서천장암진성(舒川長巖鎭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4%9C%EC%B2%9C%20%EC%9E%A5%EC%95%94%EC%A7%84%EC%84%B1&ridx=3&tot=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