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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홍판서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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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18일 (목) 03:5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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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홍판서댁
Hong Sun-hyeong’s House, Sejong
세종 홍판서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세종 홍판서댁
영문명칭 Hong Sun-hyeong’s House, Sejong
한자 世宗 洪判書宅
주소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용포동촌길 43-19 (부강리)
지정(등록) 종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38호
지정(등록)일 1984년 1월 14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6필지/3,261㎡
웹사이트 세종 홍판서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세종 홍판서댁은 1866년에 지은 집이다.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으로 자리하였다. 세종 부강리 고택으로 불리었으나 2018년 문화재 지정명칭 변경에 따라 세종 홍판서댁으로 바뀌었다. 1898년∼1904년 무렵 작성된 「충청남도 문의군양안」에 가옥 소유자가 홍순형(洪淳馨)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이 집을 ‘홍판서댁’으로 부르고 있어 명칭을 바꾼 것이다.

홍순형(洪淳馨, 1858~?)은 홍석종(洪奭鍾, 1834~?)의 아들이며, 헌종(1834~1849 재위)의 비인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4)가 고모이다. 1874년 문과 급제 뒤, 이조참판·한성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궁내부특진관, 규장각학사 등을 지냈으며,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었을 때,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였다.

가옥 구조는 전체적으로 ㅁ자 모양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마주보고 있으며, 안채를 사랑채보다 조금 높게 지었다. 안채는 몸채와 날개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몸채인 대청과 안방이 남쪽을 향해 자리 잡았다. 안채의 오른쪽 날개부분에 부엌이 있고, 그 옆의 샛문간은 사랑채와 이어진다. 사랑채는 마루가 달린 2칸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대청과 곡간을, 오른쪽에는 부엌과 방이 있다.

1차 수정

세종 홍판서댁은 조선시대에 병조판서와 예조판서 등을 지낸 홍순형(洪淳馨, 1858~?)이 살던 집으로, 1866년에 지었다.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이 집을 홍판서댁으로 불러왔다.

홍순형은 홍석종(洪奭鍾, 1834~?)의 아들이며, 헌종(1834~1849 재위)의 비인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4)가 고모이다. 1874년 문과 급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궁내부특진관, 규장각학사 등을 지냈으며,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었을 때,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였다.

1898년~1904년 무렵 작성된 충청남도 문의군 지역의 양안(量案)*에 의하면 홍순형은 문의군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며, 기록된 땅의 규모가 238,000㎡에 달한다.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으로 자리한 홍판서댁은 전체적으로 ㅁ자 구조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마주보고 있으며, 안채를 사랑채보다 조금 높게 지었다. 안채는 몸채와 날개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몸채인 대청과 안방이 남쪽을 향해 자리 잡았다. 안채의 오른쪽 날개 부분에 부엌이 있고, 그 옆의 샛문간은 사랑채와 이어진다. 사랑채는 마루가 달린 2칸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대청과 곡간이, 오른쪽에는 부엌과 방이 있다.


  • 양안(量案): 조선시대에 세금을 걷기 위해 토지를 측량해서 기록한 장부.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안채의 대청마루의 상량문에 1866년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 양안에 기록된 토지 면적이 217,299척으로 약 238,000㎡에 달했다.
    •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는 마주보고 있으며, 안채를 사랑채보다 조금 높게 지었다. 안마당에는 우물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하인들이 거주하는 바깥 행랑채 주변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ㅁ자형 평면, 숙석(熟石) 사용이나 연귀맞춤한 액자형 창틀, 측면 출입 등 건축적으로 의미가 큰 부분에 대해 설명을 보충할 필요가 있음.
    • 양안 기록은 홍순형이 이 집에 거주했음을 확인하여 문화재명 변경의 근거로 삼은 것이므로 안내문안에서 다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됨.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었을 때(병합되었을 때 -> 병합된 후),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였다.

2차 수정

세종 홍판서댁은 조선시대에 병조판서와 예조판서 등을 지낸 홍순형(洪淳馨, 1858~?)이 살던 집으로, 1866년에 지었다.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이 집을 홍판서댁으로 불러왔다.

홍순형은 홍석종(洪奭鍾, 1834~?)의 아들이며, 헌종(1834~1849 재위)의 비인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4)가 고모이다. 1874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궁내부특진관, 규장각학사 등을 지냈으며,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후,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였다.

1898년~1904년 무렵 작성된 충청남도 문의군 지역의 양안(量案)*에 의하면 홍순형은 문의군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며, 기록된 땅의 규모가 238,000㎡에 달한다.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으로 자리한 홍판서댁은 전체적으로 ㅁ자 구조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안채를 사랑채보다 조금 높게 지었다. 안채는 몸채에는 대청과 안방을 두었으며, 몸채 오른쪽에 부엌을 두고 왼쪽에 건넌방을 두었다. 사랑채는 마루가 달린 2칸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대청과 곳간을 두고 오른쪽에는 부엌과 방을 두었다. 다듬은 주춧돌과 액자형 창틀은 조선 후기 궁집에서 주로 사용된 것이어서 당시의 최고급 기법으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 양안(量案): 조선시대에 세금을 걷기 위해 토지를 측량해서 기록한 장부.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