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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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천대
자천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자천대
한자 紫泉臺
주소 전북 군산시 옥구읍 광월길 33-50 (상평리)
지정(등록) 종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지정(등록)일 1984년 4월 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자천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자천대는 원래 옥구군 선연리 하제포구의 작은 바위산을 말한다.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노닐며 독서했던 곳이라 전한다. 바위산 위에 정자가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정자를 허물었고, 1934년 옥구군수 최학수가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선연리에 정자를 다시 세웠다. 이후 옥구향교가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 경현재라 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자천대(紫泉臺)라는 이름은 바위산 옆의 연못이 항상 붉어서 붙은 이름이다.

자천대는 전면 3칸·측면 1칸의 2층 누마루집으로 팔작지붕을 올렸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에 자천대와 관련한 전설이 실려 있다. 자천대에는 두 개의 돌 항아리가 있었는데 최치원이 태수를 지낼 때 항아리 안에 비밀문서를 감춰두었다고 한다. 돌 항아리를 끌어당겨 움직이면 바다에서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주민 수백 명이 큰 밧줄로 항아리를 끌어당겨 비를 불렀다. 하지만 사신들이 옥구현에 올 때마다 가서 구경하느라 옥구의 백성들이 괴로웠다. 이에 정자를 허물고, 돌 항아리도 땅에 묻었다고 한다.

1차 수정

자천대는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노닐며 독서했던 곳이라 전한다.

원래 이 정자는 옥구군 선연리 하제포구의 작은 바위산 위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정자를 허물었고, 1934년 옥구군수 최학수가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선연리에 정자를 다시 세웠다. 이후 옥구향교가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자천대라는 이름은 바위산 옆의 연못이 항상 붉어서 붙은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자천대에는 두 개의 돌 항아리가 있었는데 최치원이 태수를 지낼 때 항아리 안에 비밀문서를 감춰두었다고 한다. 돌 항아리를 끌어당겨 움직이면 바다에서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주민 수백 명이 큰 밧줄로 항아리를 끌어당겨 비를 불렀다. 하지만 사신들이 옥구에 올 때마다 가서 구경하느라 백성들이 괴로워졌고, 이에 정자를 허물고 돌 항아리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신동국여지승람>(1530)은 “자천대(紫遷臺)는 서쪽 해안에 있는데, 지세가 넓고 펀펀하며, 샘과 돌이 좋아 즐길 만하다.라고 했으므로 해안가에 불쑥 나온 바위산 이름에 비롯되었다.
    • 원래 이 정각(亭閣)은 옥구군 선연리 하제포구의 작은 바위산 위에 있었다. 조선 후기 17세기경에는 정각은 없고 바위산만 있었다. 1934년 옥구군수 최학수가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정각을 다시 세웠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디지털군산문화대전』에서는 자천대를 “1934년 군용비행장 안으로 편입되자 당시 유림들과 최학수 옥구 군수가 이를 옥구 향교로 옮기고”라고 하였음.
    • 일제 강점기 신문기사에서는 1934년 신축이 확인됨.
    • 현 옥구향교 자천대 안내문에는 “1941년 경 일본군의 군산비행장 건설공사로…옥구향교 인근으로 이전하였으며 1964년 현 장소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되어 있음.
    • 1934년에 신축된 자천대와 현재의 자천대는 형태가 달라 보임. 현재의 자천대는 높은 석제 주초 위의 누각 구조이나 1934년에 신축한 자천대의 누하주는 지금보다 낮고 석제 주초도 아닌 듯함.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이후 옥구향교가 있는 지금의 자리로(지금의 자리로-뒤의 ‘지금의’와 겹침->이 자리로) 옮겼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 사신들이 옥구에 올 때마다 가서 구경하느라(구경하느라->구경하였기 때문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괴로워졌고, 이에 정자를 허물고 돌 항아리도 땅에 묻었다고 한다.

2차 수정

자천대는 통일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노닐며 독서했던 곳이라 전한다.

원래 이 누각은 옥구군 선연리 하제포구의 작은 바위산 위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허물었고, 1934년 옥구군수 최학수가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다시 세웠다. 이후 옥구향교가 있는 이곳으로 옮겼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자천대라는 이름은 바위산 옆의 연못이 항상 붉어서 붙은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자천대에는 두 개의 돌 항아리가 있었는데 최치원이 태수를 지낼 때 항아리 안에 비밀문서를 감춰두었다고 한다. 돌 항아리를 끌어당겨 움직이면 바다에서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주민 수백 명이 큰 밧줄로 항아리를 끌어당겨 비를 불렀다. 하지만 사신들이 옥구에 올 때마다 가서 구경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워졌고, 이에 정자를 허물고 돌 항아리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 자천대, 『디지털군산문화대전』
  • 자천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옥구 상평리 자천대,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