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해설문

유여택

HeritageWiki
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12월 22일 (토) 16:05 판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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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옮긴 이듬해에 왕이 수원에 내려와 행궁에 머물 때 신하들을 만나서 일을 보기 위해 지었다가 1794년(정조18)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해 가을에 건물을 증축했다. 처음 건물 이름은 은약헌(隱若軒)이라 했다가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고쳤다. 은약헌은 옛 수원읍 시절부터 사용하던 건물 이름이었다. 유여택이란 이름은 시경에서 따온 것으로, 주나라의 기산(岐山)을 두고 하늘이 산을 만들어 ‘이곳을 주시어 거처하게 하였다(此維與宅)’는 고사에 근거했다. 정조는 은약헌 시절에도 이 건물에서 과거시험을 치러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고 또 신하들을 만나보았으며 유여택으로 이름을 고친 후에도 수원에 내려오면 반드시 이곳에서 신하들을 접견하였다. 처음 지은 건물은 8칸 규모에 북쪽 1칸을 누마루로 해서 공신루(拱宸樓)라 이름 짓고 또 뒤쪽으로 서쪽 5칸, 북쪽 2칸을 덧붙인 모습이었다. 증축하면서 실내에 온돌 4칸반을 들이고 북쪽 방에도 온돌을 들여 거주할 수 있도록 꾸몄다. 또한 북쪽과 남쪽 및 서쪽으로 행각을 크게 내서 행각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을 만들었다. 1800년(순조즉위년) 정조가 승하하자 현륭원 재실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와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초상화를 한 동안 이곳에 모시고 있다가 이듬해 화령전이 완성되면서 어진들을 모두 화령전으로 옮겨 모셨다.

  • 연혁 - 1790년(정조14) 건립 / 1794년(정조18) 증축 / 2002년 복원
  • 구조 - 겹처마 팔작지붕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유여택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다가, 임금이 행차했을 때에는 신하들을 접견하고 집무를 하던 곳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주관하고, 합격자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에는 현륭원 재실에 있던 어진과 창덕궁에 있던 어진 일체를 이곳에 잠시 봉안하기도 하였다.


수원시 관청 내에 장관이 사용하는 별당으로 지은 건물이다. 화성 축성을 하면서 건물을 증축해서 행궁의 별당으로 삼았다. 정조 임금이 이곳에서 신하들을 만나보고 수원에서 과거시험을 치렀을 때 합격자들을 여기서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건물 이름은 정조 임금이 기원전 5세기 경에 지어진 중국의 오래 된 시집인 시경에서 따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