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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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산사
Chaesansa Shrine
채산사.jpg
대표명칭 채산사
영문명칭 Chaesansa Shrine
한자 茝山祠
주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청성사길 101 (가채리)
지정(등록) 종목 시도기념물 제30호
지정(등록)일 1976년 8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
시대 대한제국시대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채산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채산사는 포천 출신의 문신이자 항일운동가인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그의 손자인 염재(念齊) 최면식(崔勉植)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최면식은 면암의 둘째 아들인 최영학의 자로 일제강점기 때 포천 출신의 의병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최익현은 철종6년(1855)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후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관직강·사헌부장령·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70년(고종 7)에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1868년에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임명되어 부폐 된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권신들이 반발했고 도리어 대원군의 하야를 부자이간의 행위로 규탄하였다. 1873년부터 제주도에서 3년간의 유배생활을 계기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 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였다.

광무9년(1905) 일본의 강제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재소를 올러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후 최익현은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대마도로 건너기 전 부산 앞바다에서 신발에 모래를 채우며 ‘비록 육신은 일본으로 가지만, 일본 땅은 밟지 않겠다.’라고 했다. 유배지에서는 ‘일본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단식을 한 끝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생각하는 그의 절개를 엿 볼 수 있다.

1906년 포천의 유림들이 그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처음으로 사당을 건립하였으나, 192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고 이어 1935년에 재건되었으나 다시 1943년에 일본인이 헐었다. 1949년 일본에 의해 헐린 채산사의 사당은 면암의 뜻을 기리고자하는 지역의 유생들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현재의 채산사는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국문 수정

채산사는 포천 출신의 문인이자 항일운동가인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그의 손자인 최면식(崔勉植, 1891~1941)을 모신 사당이다.

포천에서 태어난 최익현은 1855년에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고위 관직을 거쳤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효를 주장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에는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나, 결국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으며, 단식으로 저항하다 숨을 거두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최면식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국내와 만주를 오가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1921년 체포되었는데, 1925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출옥한 이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최면식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1년 세상을 떠났다.

채산사는 1906년 최익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처음 건립되었다. 192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다가 1935년에 재건하였고, 1943년에 일본에 의해 다시 철거되자 1949년에 또 다시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75년에 이를 해체 복원한 것이다. 1986년부터 손자 최면식의 위패와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다.

영문

Chaesansa Shrine

This is a shrine dedicated to a renowned scholar and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ctivist, Choe Ik-hyeon (1833-1906), and his grandson Choe Myeon-sik (1891-1941).

Born in Pocheon, Choe Ik-hyeon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855 and served several high-rank official posts. When the illegal Japan–Korea Protectorate Treaty of 1905 was signed, he vocally insisted on its annulment and was among the first to initiate the anti-Japanese movement to support Korean sovereignty. The following year, at the age of 74, he even led armed resistance known as the Righteous Army, but eventually was arrested and sent to jail on Tsushima Island, where he went on a hunger strike and died. In 1962, he was posthumously awarded the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1912, two years after Korea lost its sovereignty and became a colony of Japan, Choe Ik-hyeon’s grandson Choe Myeon-sik fled to Manchuria and joined the anti-Japanese movement. In 1921, due to his work with the movement in Korea and Manchuria, he was arrested and put in jail. In 1925, due to health problems, he was released and continued his struggle for independence, but he died four years before he could witness Korea's liberation.

This shrine was first constructed in 1906 to honor Choe Ik-hyeon but was later demolished by the Japanese in 1920. It was rebuilt in 1935 but again taken down by the Japanese in 1943. The current building was constructed in 1949 and was dismantled and renovated in 1975. And in 1986, the spirit tablet and portrait of Choe Myeon-sik were also enshrined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