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림고택
청도 운림고택 Ullim House, Cheongdo |
|
대표명칭 | 청도 운림고택 |
---|---|
영문명칭 | Ullim House, Cheongdo |
한자 | 淸道 雲林古宅 |
주소 |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2길 14 (임당리) |
지정(등록) 종목 | 국가민속문화재 제245호 |
지정(등록)일 | 2005년 1월 3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2필지/3,708㎡ |
웹사이트 | 청도 운림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기존 국문
조선시대 궁중 내시로 봉직한 김일준(金馹俊)이 통정대부 정3품의 관직까지 지내다 만년에 낙향하여 집을 짓고 이 곳에서 여생을 마친 후 후손들이 줄 곳 이곳에 거주해 왔다. 청도 임당리에는 1592년의 임진왜란 이전부터 400년간 16대에 걸친 내시가계(內侍家系)가 이어져 왔다. 이 건물은 내시종가(宗家)의 가옥이며, 건물 전체의 구조로 보아 19세기 건축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 점, 안채와 안마당이 건물과 담장으로 완전히 폐쇄된 점, 그리고 안채가 북향으로 놓여 있다는 점 등이다. 이 건물은 내외공간이 일반 사대부의 저택보다 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고, 건물 배치도 출입을 잘 관리할 수 있게 구성한 것 등 특이한 주택형식을 보여 주고 있어 내시주택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한말의 내시(內寺)로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은 김일준(金馹俊, 1863~1954)이 낙향하여 지은 고택이다. 운림(雲林)은 주변의 운문호와 마을 이름 임당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확인 예정) 청도 임당리는 조선 중기부터 400여 년 간 내시가(內侍家)가 있었던 곳으로 내시가문은 이성(異性), 독자(獨子)로 가계를 계승하였다. 이 집에서 나온 가계문서에는 김일준 내시 가계의 2세부터 15세까지 이름과 실직, 부인의 본관, 산소의 위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청도운림고택은 큰 사랑채, 중 사랑채, 안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사당, 대문채로 구성되었다. 큰 사랑채가 대문부터 안채로 들어가는 동선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으며, 안채로 들고 나가는 것은 중 사랑채 좌측의 중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했다. 이것은 보통의 양반가옥보다 더욱 엄격하게 안채의 노출을 꺼리고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가옥구조이다. 청도운림고택은 서울·경기지역 외 유일한 내시 가옥으로 조선시대 가옥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1차 수정
운림고택은 한말의 내시(內寺)로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은 김일준(金馹俊, 1863~1954)이 낙향하여 지은 고택이다. 운림(雲林)은 주변의 운문호와 마을 이름 임당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청도 임당리는 조선 중기부터 400여 년간 내시가(內侍家)가 있었던 곳으로 내시가문은 이성(異性), 독자(獨子)로 가계를 계승하였다. 이 집에서 나온 가계문서에는 김일준 내시 가계의 2세부터 15세까지 이름과 실직, 부인의 본관, 산소의 위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집은 큰사랑채, 중사랑채, 안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사당, 대문채로 구성되었다. 큰사랑채가 대문부터 안채로 들어가는 동선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으며, 안채로 들고 나가는 것은 중사랑채 좌측의 중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했다. 이것은 보통의 양반 가옥보다 더욱 엄격하게 안채의 노출을 꺼리고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가옥 구조이다. 운림고택은 서울·경기지역 외에 남아 있는 유일한 내시 가옥으로 조선시대 가옥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자문의견
2차 수정
참고자료
- 장희흥, 「조선후기 청도 내시부 통정 김일준가의 가계 계승」, 『역사민속학』 46, 2014, 314쪽 주석(4) -> 이성(異性), 독자(獨子)로 가계 계승. 김일준 가계문서 2~15세 이름과 실직, 부인의 본관, 산소 위치 기록
- 청도 운림 고택, 『디지털청도문화대전』
- 청도 운림 고택, 『지나간 시간을 읽다-민속문화재, 이야기를 입다』(문화재청, 2017)
- 청도 운림 고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