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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남산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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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9일 (화) 12:2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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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남산영당
금남 남산영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금남 남산영당
한자 錦南 南山影堂
주소 세종특별자치시 남산길 51-4
지정(등록) 종목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7호
지정(등록)일 2012년 12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61.3㎡
웹사이트 금남 남산영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1906년에 세운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남이웅은 선조(1567∼1608 재위), 광해군(1608~1623 재위), 인조(1623~1649 재위) 때 정치가로 평소 법을 잘 지키고 검소하였다. 1613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지냈다. 병자호란(1636. 12~1637. 1)이 끝나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함께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남산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며, 앞에는 삼문과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영당 안에는 남이웅의 영정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사당 뒤쪽에는 남이웅의 무덤과 1658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

1차 수정

1906년에 세운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남이웅은 선조(1567~1608 재위), 광해군(1608~1623 재위), 인조(1623~1649 재위) 때 정치가로 평소 법을 잘 지키고 검소하였다. 1613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지냈다. 1637년 1월 병자호란이 끝나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함께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남산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며, 앞에는 삼문과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영당 안에는 남이웅의 영정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사당 뒤쪽에는 남이웅의 무덤과 1658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