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위봉산성
완주 위봉산성 Wibongsanseong Fortress, Wan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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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완주 위봉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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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Wibongsanseong Fortress, Wanju |
한자 | 完州 威鳳山城 |
주소 | 전북 완주군 소양면 산7-4번지 외 1-32 외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471호 |
지정(등록)일 | 2006년 4월 6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736,835㎡ |
웹사이트 | 완주 위봉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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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위봉산성은 백두대간의 금남정맥이 장안산에서 소양의 도솔봉으로 내려와 문필봉, 장대봉, 되실봉, 추줄산으로 이어지는 산세를 갖춘 능선에 성곽을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이란 명칭은 소양면 대흥리 위봉마을이 봉황에 둥지를 튼 형국에서 생겨난 지명이며, 봉황이 새끼를 낳고 어미 2마리와 새끼 2마리가 도솔봉, 문필봉, 되실봉, 장대봉으로 날아가 앉았다 하여 위봉이라 하였다.
숙종 원년(1675) 전라감사 겸 부윤 권대재(權大載)가 위봉산성 내에 행궁을 조성하여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에 모셔둔 태조 어진을 옮기기 위한 목적으로 위봉산성을 축성하였다. 위봉산성 내 위봉사 옆에 행궁과 위봉산성진을 설치하였는데, 지금도 행궁의 축대와 주춧돌은 제 위치에 남아있다. 위봉산성 성벽 둘레는 약 8,539m, 성벽 높이는 1.8m~2.6m이고, 성문은 서‧동‧북 성문 3개소, 암문 8개, 포루 12개, 장대 2개, 샘 45개, 방축 9곳, 염산 1곳이 있다. 위봉산성에는 위봉사, 행궁, 내성창, 장대, 위봉진, 장교청, 군기고 등이 있었으며, 군병들은 전주 이하 익산‧김제‧금구‧임실‧고산‧진안‧용안‧함열에 소속되어 있었다. 위봉진의 수성장은 전주부 판관이 겸했으며 산성별장 이하 군관, 병졸을 두었다.
실제로 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 때 동학 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하자 태조의 어진과 시조위패를 위봉산성 안 행궁(行宮)에 피난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안하였으나, 행궁을 조성한지 오랜 세월이 지나 퇴폐하여 위봉사의 대웅전에 임시로 옮겨 모신 적이 있다.
되실봉 뒤쪽 위봉산성 밖에 위치해 있는 태조암은 위봉사의 산내암자로 1675년 위봉산성이 축조된 후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어진을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행궁을 세우고 그것을 봉축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 현재의 태조암 일대에는 적어도 1630년대 이전에 이미 암자 형태의 불사가 다수 존재해 있었고, 그 후 1675년 위봉산성의 축조와 함께 건립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도내 유적지로 완주군에는 이곳 위봉산성, 위봉사, 전주시에는 경기전, 오목대, 조경단, 만경개암각서, 남원시에는 황산대첩비지, 피바위, 여원치마애불, 정산봉, 진안군에는 은수사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또한 설화‧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대표적인 곳으로 완주군에 태조암, 남원시에는 고남산제단, 장수군에는 뜬봉샘, 임실군에는 상이암, 순창군에는 만일사 등 열여섯 곳을 들 수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위봉산성은 1675년부터 1682년까지 산의 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돌로 쌓은 산성이다. 1808년(순조 8)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중수(重修)하였다.
위봉산성은 변란에 대비하는 군사적 목적과 더불어, 성 안에 유사시 전주에 모셔진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과 전주 이씨 시조의 위패를 모셔오기 위한 행궁을 함께 조성하였다.
실제 동학농민운동으로 전주가 동학군에게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위패들을 이곳에 피난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행궁이 지은 지 오래 되어 퇴락하여 위봉사 대웅전에 임시로 옮겨 모신 적이 있다고 한다.
전주에서 가까운 곳 중 지형이 험준한 곳을 골라 추줄산 능선에 쌓은 이 산성은 둘레 약 8.6㎞, 성벽 높이는 1.8~2.6m에 달하는 대규모의 성이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성벽과 여장, 총안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기록에 남아있는 성문지 4개소 중 3곳을 확인하였다. 이 중 전주로 연결되는 서문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서문은 산성의 정문으로 기능한 것으로 추정되며, 문루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축으로 된 홍예문만 남아있다. 서문지 밖에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옹성은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1994년에 복원되었다.
이 외에도 암문지 6개소, 포루지 13개소,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게 쌓은 장대터 2개소를 비롯해 성 밖으로 물을 빼기 위해 조성한 수구지 1개소와 우물지 2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성 안에 위치한 위봉사와 행궁지를 비롯해 안팎으로 염산, 군기고 등의 추정 건물지 28개소가 확인되었다.
- 안팎으로 염산, 군기고 등의 추정 건물지 28개소가 확인되었다. : 2003년 전북문화재재단 지표조사 내용 근거함.
- 기록에 남아있는 성문지 4개소 중 3곳을 확인하였다. : 북문지는 도로와 민가 등이 들어서 흔적 확인이 어려움. (2003년 전북문화재재단 지표조사 내용 근거함)
- 기록에는 우물 45개가 있었다고 하나, 흔적이 확인된 것은 2개소이다. (2003년 전북문화재재단 지표조사 내용 근거함)
1차 수정
위봉산성은 1675년부터 1682년 사이에 축조된 석성이다. 1808년에 당시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중수(重修)하였다. 둘레 약 8.6㎞, 성벽 높이는 1.8~2.6m에 달하는 대규모의 성이다.
위봉산성은 변란에 대비하는 군사적 목적과 더불어, 성 안에 유사시 전주에 모셔진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과 전주 이씨 시조의 위패를 모셔오기 위한 행궁을 함께 조성하였다. 실제 동학농민운동으로 전주가 동학군에게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위패들을 이곳에 피난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행궁을 지은 지가 오래 되어 건물이 퇴락했기 때문에, 위봉사 대웅전에 임시로 옮겨 모신 적이 있다고 한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성벽과 여장, 총안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기록에 남아있는 성문지 4개소 중 3곳이 확인되었으며, 이중 전주로 연결되는 서문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외에도 암문지 6개소, 포루지 13개소,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게 쌓은 장대터 2개소를 비롯해 성 밖으로 물을 빼기 위해 조성한 수구지 1개소와 우물지 2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자문의견
2차 수정
참고자료
- 2008국가지정문화재 지정보고서 - 사적편 1, 문화재청, 2008
- 디지털완주문화대전 http://wanju.grandculture.net/wanju/dir/GC07000457?category=%ED%91%9C%EC%A0%9C%EC%96%B4&depth=3&name=%EC%95%84&type=titleKor&search=%EC%95%84
- 쏠쏠한 일상,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jkks&logNo=221161907895 → 산성 내력 및 발굴 건물지 상세 설명
-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424&index_id=cp04240005&content_id=cp042400050001&print=Y → 포곡식산성
- 지역N문화역사문화유산-선조들의 발자취, 성과 옛도로 : 조선 후기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완주 위봉산성 https://ncms.nculture.org/castle-road/story/2111 → 서문 밖 옹성 복원 년도 제시.